처음에는 같은 편이었다. 전광훈과 손현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무리들 이야기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여의도와 광화문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지 못했다. 탄핵반대라는 동일한 목표를 지녔음에도 이들은 갈라져 다른 곳에서 집회를 열어야 했다.
한 군데 모여 집회를 하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들은 그러지 못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왜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사실 이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3-35)
예수님은 점점 더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곧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럴수록 제자들은 조바심이 났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투었다. 서로가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놓고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을 불러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바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광훈이나 손현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런 착각에 빠진 것은 이들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너무도 많은 한국의 목사들이 전광훈이나 손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광훈이나 손현보보다 더 인정을 받는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그런 교회들을 하다 은퇴한 더 유명했던 목사들 역시 전광훈이나 손현보를 지지했다. 그런 분들이 전광훈이나 손현보와 같은 만무방들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더 큰 충격이었다.
그러면 왜 한국의 목사들은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위에 인용한 성서의 기사가 설명해준다. 오늘날 목사들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강석 목사가 생각난다. 그는 새에덴교회의 목사다. 나름 큰 교회를 이루었다. 그가 속한 교단의 총회장도 역임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롤모델이 조용기 목사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히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 조용기 목사를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가 소 목사의 관심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나름 커지는 일에 있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소 목사처럼 성공하지 못한 목사들의 경우도 소 목사와 마찬가지로 커지는 것이 주관심사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오늘날 목사들의 관심사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개신교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야말로 오직 유일한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 가톨릭 역시 이 점에 있어 다르지 않다. 그것은 “교황” 혹은 “교종”이라는 직위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어부의 반지”를 상징적으로 낀다. 생각을 해보라. 하나님 나라에 교황이나 교종이라는 직책이 가당키나 한가.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난파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 큰 사람들을 추종하는 이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는 꼴찌들의 나라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커지는 것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6-37)
예수님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후에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신 후에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작아지라는 것이다. 작은 자를 섬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꼴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광훈을 생각해보라. 그의 앞에서는 하나님께서도 까부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까불면 하나님도 죽어야 한다. 이것이 말인가 똥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추종하고, 대형교회 목사들 대부분이 그런 만무방을 선지자로 칭송한다. 그 이유는 한 가지다. 그들이 모두 가장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들이 없다. 전광훈과 손현보만이 아니다. 누구든 크고자 하는 사람은 경쟁하고, 서로를 폄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커지는 것이 능사인 그리스도교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곳이 되었다.
윤석열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었던 김장환 목사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수원에 있는 그 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나면 국회의원이나 장군과 같은 사람들이 감장환 목사의 뒤를 따라 퇴장한 후에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참람한 모습인가?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사고다.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눅 14:7-11)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맨 끝자리에 앉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실천해보라. 이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