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명제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간혹 돈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도 돈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돈과 무관하게가 아니라 돈을 미워하며 살기를 원한다. 돈을 업신여기며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돈을 미워하고, 돈을 업신여기려 한다고 해서 돈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돈에는 순기능이 있다. 아니 순기능 정도가 아니라 魔力(마력)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힘과 권력으로 작동한다. 사실 돈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라.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기꺼이 멸시를 당하고 심지어는 다른 경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엄성마저 포기한다.
아주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브라질에 여행을 갔던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브라질의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는 총을 든 경비원들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곳에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곳에 사는 할머니들에게는 비서들이 있다. 멋지고 똘똘한 여성들이 부자 할머니들을 따라다니면 시중을 든다. 그 멋진 여성들은 한달에 불과 백 달러의 돈을 받기 위해 그 일을 한다. 그것은 할아버지들의 경우에는 더욱 현저하다. 아마도 할아버지들의 경우는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것이고, 더 멋진 여성들이 그 일을 할 것이다.
나는 비교적 덜 적나라한 예를 들기 위해 애를 쓴 것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한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것이 돈이 가지는 마력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을 보아도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돈의 유사전능성은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브라질의 젊은 여성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김 건희를 보라. 그는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자 아산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것은 정확하게 돈이 하는 일이다.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돈의 시녀다. 그 일이 얼마나 불의한가. 하지만 김 건희의 입장에서 그런 일은 당연하다. 그의 사고가 바로 돈이 주는 가치관이다.
그래서 성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반대가 사탄이 아니라 돈(맘몬)임을 분명히 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아마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말씀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이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돈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기는 이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돈의 힘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만큼 돈의 마력은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교회를 드나들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는 이들도, 돈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에 실패한다. 단순히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없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다 그런 거지”
그러나 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진실한 예수의 제자들은 실제로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겼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거나 수도원과 같은 곳에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행위가 바로 돈을 미워하는 일이며, 돈을 업신여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면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겨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나는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속한 사람들도 공동체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돈을 업신여기거나 미워하는 일에 대부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교묘하게 그리스도교 안에 수도원이나 수녀원 그리고 평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는 성직자들과 교회라는 완벽한 틀을 만들어 놓았다.
착각이다!
돈은 그런 틀을 만들어놓음으로써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 가짜 길(가상현실)을 만들어놓았다. 참으로 생각할수록 절묘하며 교묘한 방식이다. 누구도 이런 그리스도교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도 자기 자녀나 부모가 굶어죽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시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기 자녀가 그런 경우를 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맘몬의 가상현실이 무서운 것은 그렇게 그리스도교 안에 독신이라는 충성심 넘치는 계층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인간이 지나칠 수 없는 가장 참혹한 현실을 피할 길을 마련해놓았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이 존재함으로써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선별된 특별한 사람들은 물론 그런 사람들을 돈으로 섬기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교가 건재하다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복음이 왜곡되고 변질되었음을 보지 못하도록 완벽한 가상현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실제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가상현실을 현실로 믿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맘몬은 위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도, 공동체이기만한 그리스도인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간다. 그곳에서만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참된 믿음이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현실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나는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일을 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해도 죽은 후에라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오늘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실천한다.
맞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길 수는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