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손자를 낳은 것은 그 아이가 우리를 위해 해준 가장 큰 효도다. 나는 “낳은”이란 표현을 “낳아준”으로 적고 싶었다. 손자를 낳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기에 그냥 “낳은”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낳아준” 것이다. 그것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내가 힘이 없어지고, 손자가 자라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이 내 기분과 감정 역시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로서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손자가 내게 준 행복보다 기쁜 일은 없다.

큰애가 손자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랑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했다. 어쩌면 정의를 새롭게 했다기보다는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알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크고 깊기에 정의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새롭게 바라보게 된 말씀이 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 49:15)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온 피조세계와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 거짓 고백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고백을 드리면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이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점차 깨달아 알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파산 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지난 이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점차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 힘든 때는 너무도 많았다. 죽음에의 유혹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필요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가장의 책임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근저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결핍 때문에 죽고 싶은 적은 없다. 다만 사랑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 죽고 싶었다. 그 죽고 싶은 감정을 통해 나는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내게 주시는 은혜와 필요의 공급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해주는 방편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가면서 나는 조금씩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0-34)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믿음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죽음에의 유혹을 수없이 지나면서 점차로 믿음이 강화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이 이유와 원인은 그럴 때마다 조금씩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베드로의 믿음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그도 믿음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는 전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그런 믿음이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통해 자신이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 믿음이 강화된 것은 그런 과정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도 않고, 현재의 괴로움 역시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은 지난 내 삶의 열매라고도 할 수 있다. 신용불량자로 이십여 년을 살면서 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이 바뀌었다. 특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들이대던 도덕적인 잣대를 완전히 부러뜨려버렸다.

결국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한 수녀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은화 한 닢을 호수에 집어던졌던 사실을 늘 상기한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손자를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 녀석을 통해 내가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큰애가 녀석을 기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알던 사랑과 다른 사랑을 보게 되었고, 그 역시 사랑에 대한 내 이해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기쁨이 배가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더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성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면 내가 변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애간장이 끊어지는 긍휼을 보이신 것도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의 시대는 AI가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짧게는 2-3년, 길어도 십여 년이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 주도하는 시대가 아니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성이다.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인간성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인간성이 말살되는 시대가 될 따름이다.

새삼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이야말로 인류가 멸망의 대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야말로 온 인류는 물론 온 피조세계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돈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 영혼 깊은 곳에 아로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야말로 온 인류와 피조세계를 위한 오직 유일한 희망이다.(인간성이 말살된 영혼 없는 인간이 궁금하다면 트럼프와 머스크와 푸틴과 윤석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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