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내가 드나들던 공동체에서 통무 역할을 하시던 분이 갑자기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의 목사님의 아내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돈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그때 나는 그런 그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의 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잘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돈은 교환의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김동호 목사님이다. 그런 그의 주장은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었고,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끗한 부자”(청부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청부론 역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약간의 실천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그런 그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은 없다.
그렇다. 돈에 장사는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돈이 인격적인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속으로는 절반밖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속마음에는 자신이 돈을 잘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너무 많지만 않으면 그것은 통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이 돈의 魔力이다. 돈은 결코 사람을 윽박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은밀하게 사람의 마음을 장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돈은 아름답다. 사람들은 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돈의 마력에 대한 경계심을 해제한다. 그리고 그렇게 경계심이 해제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돈의 노예가 된다.
나는 최근 김건희의 여러 사건들의 보도를 통해 김건희 일가가 바로 그렇게 돈에 완전히 노예가 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눈에는 돈이 보인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큰돈을 번다. 그들의 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행동이 惡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특히 주가조작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그들의 방식은 악한 정도가 아니라 사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바로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의 모습이다.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려는 윤가는 얼마나 상남자인가? 어떤 아내라도 그런 남편을 만나면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돈의 노예인 그런 남편 역시 때가 되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나는 며칠 전 글에서 인간성이 사람의 속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내용을 썼다. 돈은 정확하게 바로 그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한다. 인간성이 사라진 인간은 잔인하게 다른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게 된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렇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돈의 노예가 된 인간에게는 동정심이나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것에서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괴물들이 된다.
이제야 나는 돈을 두려워하던 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돈을 미워하려면 돈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생겨난다. 그 두려움은 돈이 지닌 마력에 대한 경계심이다. 그 두려움은 돈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것은 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태도다.
그렇다. 돈은 너무도 아름답다. 그래서 돈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이 마력을 지닌다는 것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킴으로써 사람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역사 속의 경국지색들을 살펴보라. 모든 권력자들은 경국지색에 빠져 실각했다. 돈은 그런 경국지색들의 총화다. 아무도 돈의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없고, 돈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결국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이것이 성서에서 돈을 미워하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돈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장악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미워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기사에서 협성교회 최정규 목사의 돈과 관련된 내용을 보았다. 그는 불투명한 선교비의 집행으로 거액의 동을 횡령했다. 나는 그렇게 횡령한 돈을 도대체 어디에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을 미워하면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경제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샬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행 4: 32-35)
내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서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돈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典型이다. 여기에는 더하고 뺄 것이 없다. 다른 해석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교회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미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 나라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선교비는 비자금의 근원이다. 횡령의 근원이기도 하다. 아무도 선교비라는 명목에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확장이 되었다. 돈으로 정교한 미끼를 만들어 사람들을 꼬이는 낚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영웅심리와 호승심을 이용해 커지려는 사람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되었다. 이 명백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누구도 돈을 미워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대원칙은 ‘자발적 동의’다. 오늘날 선교는 선함을 가장한 속임수가 되었다. 선교를 이렇게 만든 것도 돈의 마력이다. 돈은 완벽하게 아름답다. 아니 지독하게 아름답다. 그런 돈을 마다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할 수 있으려면 내가 돈에 속수무책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돈의 그 아름다움을 두려워하게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돈을 미워한다는 것은 돈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점차로 돈이 주는 편리함과, 쾌감과, 행복이라는 신기루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이후에도 조금이라도 돈에 긍휼함을 보이는 순간 순식간에 돈은 마음을 장악하고 사람을 삼켜버릴 것이다.
교회가 공동의 소유를 실천하는 경제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돈의 마력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만이 선교의 본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