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아닌데 선거철이 되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황교안이다. 이분은 왜 선거에 출마하셨는가. 더구나 그가 내세우는 건 부정선거다. 부정선거가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면서 선거에 출마하는 건 도대체 무슨 연유인가. 자신이 낙선하는 것으로 부정선거의 증거를 확인하려는 것인가. 이런 사람이 우리 사회의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를 보며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인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의사나 법조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정신병자로 의심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고혈압 약을 처방받기 위해 몇 달에 한 번씩 병원을 방문하면서 나는 의사들이 하나님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은 마치 신처럼 군림한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검사결과만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런 그들이 간과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결과 역시 그 사람의 삶의 결과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삶을 모른다. 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그들은 이해관계에 취약하다. 자신의 처방약이 그들의 권력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결국 그들은 드러나지 않게 자신의 자리에서 신의 노릇을 하고 있다.
법조인들의 경우는 이러한 현상이 더더욱 치열하다. 하지만 의사보다는 그들의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 법조인이라고 해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검사, 판사, 변호사로 구분되어 있는 법조인의 역할은 의사보다는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뉜 영역에서 그들 역시 군림하는 절대자라는 사실은 동일하다.
얼마 전 의대 정원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윤석열 정부와 의료계와의 싸움은 그야말로 이전투구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군림하고 있는 대표적인 두 직업군의 사고가 장삼이사와 다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식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오만증후군을 떠올리게 된다.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신경학자 오웬과 그의 공동저자 조나단 데이비슨은 2009년 브레인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이 장애를 ‘오만 증후군’(Hubris syndrom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증후군을 “권력자, 특히 굉장히 성공적으로 특정 기간 동안 큰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린 지도자에게 생길 수 있는 장애”라 정의했다.
권력은 환자의 공감능력을 모두 죽이는 종양과 같으며 오만 증후군의 14가지 의학적 증상에는 남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매우 떨어지는 현실성, 침착하지 않거나 무모한 행동, 무능함의 표출 등이 있다고 한다. 브레인 학술지에 실린 ‘오만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의 단층 촬영한 뇌 사진들은 권력이 어떻게 사람의 뇌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은 정신적 외상과 같이 뇌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민주주의 치명적인 한계는 이처럼 오만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이 정치지도자가 된다는 데에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선거의 시기에는 여지없이 그런 장면들이 연출된다. 처음에 인용한 황교안만이 아니다. 이낙연은 어떤가. 그도 국무총리를 지내고 말을 잘 하고 사고가 유연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일들을 보라. 얼마나 현실감각이 없는가?
문제는 오만증후군이 질병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행적으로 어떤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오만증후군에 감염된 사람들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과거에는 괜찮았던 사람도 성공이나 부에 의해 권력이 커지면 병세는 여지없이 악화된다. 지금의 그와 과거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물론 한 인간의 인생은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은 그런 상식을 여지없이 박살낸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난제 가운데 난제라고 생각한다. 누가 오만증후군의 병세가 덜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오만증후군에 감염된 자체로 이미 자격상실임을 인정해야 하지만 오만증후군에 감염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은 결국 위선이나 지금과는 상관이 없는 과거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끔은 오만중후군의 증세가 가벼운 사람이 정치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으로 생각나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강기갑이다. 수사 출신의 그는 정치하는 내내 무슨 기인이나 괴짜로 인식되었다. 어쩌면 그는 오만증후군에 감염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정치판에서 물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강기갑과 같은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통된 점은 이런 사람들은 정치판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만증후군에 감염되어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사고는 윤석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앞에서 언급했던 의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절대자를 넘어 신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이 죄인들도 마침내 바람처럼 사라져서 없어질 것이다.”(합 1:11)
나는 이 말씀이야말로 오만증후군에 대한 해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힘을 가지려는 것, 힘을 추구하는 것이 곧 죄인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성서는 초지일관 무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 시작은 자기부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안타깝지만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로 부름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거의 시기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중요성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오만증후군에 감염된 정치가가 아니라 완전히 무력해진 참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 그들이 모여 산 위에 세운 마을을 이루고 그들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가 빛이 되어 세상에 드러날 때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작동된다.
그래서 나는 어제 있었던 대통령 후보자 토론 방송을 보지 않았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이 너무도 싫다. 그나마 그 토론에 이준석 하나만 나왔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그 자리에 한동훈까지 있었다면 그건 상상하기 싫은 최악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내가 미친놈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지니면 지금의 나처럼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 희망은 온전히 힘을 버린 무력한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