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성령님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되게 하심이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제도 조직 이념 등으로 하나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유기적 조화이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성경은 몸의 하나됨으로 표현한다 (고전12:12-27 ‘몸’19회) 더 이상 더 적절함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표현이다. 말 한마디 하는데 우리의 650개 근육 중 72개를 움직이지만 하나도 의식하지 않고 몸의 자율적인 조화로 이루어진다. 우리 몸의 신묘막측함이 하나님의 신비이다 (몸=우주)

이러한 신비로운 하나됨을, 성령님은 단절되어 성격도 기질도 성향도 다른 개체들로 유기적 조화를 이루고 누리게 하신다

이 하나되게 하심의 비밀은 ‘온유하심‘이다. 온유하다고 성경에 씌여진 사람은 단 두 사람으로 구약에서는 모세(민12:3) 신약에서는 예수님(마11:29)이다. 이 두분은 어느 누구에게도 강제하지 아니하고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분들이다

이것이 성경의 온유함으로, 성령님은 결코 에고와 싸워 이기지 않으시고도 우리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신다

에고는 모든 것을 한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섬기고, 헌신한다. 심지어 회개하고 아파한다, 단 한가지 ‘자기를 위하여‘ 성경은 이것을 강팍함이라 한다. 중심이 일관되게 오직 자기 이익과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에고는 아무리 싸워서 이겨도 그 중심을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에고가 힘을 잃을 때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용광로에서 녹을 때 뿐이다.

노름에 중독된 아들이 술냄새를 풍기며 아침에 돌아오자 홀어미가 네 손목을 잘라서라도 노름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 하자, 아들은 오른 손목을 내밀며 ‘자르시오’ 했다. 어미는 아들의 손목을 붙잡고 부엌칼로 내리쳤다. 피가 튀고 잘린 손이 뒹굴었다. 그러나 그 잘린 손은 어미의 것이었다. 차마 아들이 손목을 자를수 없는 어미가 제 손목을 내려친 것이다. 

아들의 손목이 잘려졌다면 아들은 언젠가는 그 손목으로 또 노름방을 갈 것이다. 그러나 잘린 어미의 손목을 기억하는 한 그 아들은 다시는 노름방에 갈 힘을 잃어 버렸다

온유는 원수를 사랑의 가슴에 품어 질식사 시키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에고의 단절을 넘어 생명의 유기적 하나됨을 이루는 다른 길이 없다.

종교로는 그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단절에서 하나됨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인간의 깨우침 결단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며 종교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싸워서 이기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품을 때 우리 안에 두 가지가 열린다 : 중심의 진실함과 자원함. 에고의 껍질이 깨어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본성, 즉 하나님의 형상이 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교의 특징을 산상수훈에서 위선 (hypocrisy)이라 하였다. 종교는 옳고 선하고 의로운 것을 가르치고 행하기도 한다 (all for ego)그러나 결코 중심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는 에고의 중심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하되 자기 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종교인에게 화 있으리라!를 7번 선언하시고 “아벨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저주하셨다

종교는 성령의 반대이며, 오늘날 성령님의 역사가 희귀한 것은 중심의 진실과 자원함이 없는 에고의 종교 때문이다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