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려울까 쉬울까?
사람들마다 그 대답은 다를 것이다. 내 생각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가능하다. 사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변질되었다. 하지만 성령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그들을 보호하신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내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 23“23-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목사가 된 후 나는 설교자로서 수많은 설교들을 읽고 들었다. 정말 많이 그랬다. 처음에는 그런 설교들이 내 설교의 자료들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읽은 설교들은 내 설교 자료가 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그 책들의 내용을 내 설교의 자료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설교는 보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위선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만을 했다. 그것 역시 이유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보다 더 심층적이고, 그런 이유를 밝힌 설교나 책의 내용을 나는 보지 못했다.
율법의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모를 수는 없다. 설고자로서 내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자료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들의 자료들이다. 그것들을 읽으면서 나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말씀에 대해 깊이 묵상했는지를 발견했고, 그들의 그런 사유가 얼마나 깊은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교의 지도자들로서 그런 것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토록 말씀에 열심인 그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던 것일까?
여기에는 가능과 불가능의 역설이 존재한다. 그들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이 해도, 해도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들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불가능에서 돌아서서 가능한 것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울타리율법을 통해 확인된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율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이런 울타리율법들은 특히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안식일 규례와 정결예식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율법의 조항이었다. 그런 안식일 규정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장 큰 원칙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일인가를 일일이 정했다. 그것은 문화의 변천에 따라 달라졌고, 지금도 그들은 그것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 안식일 규례 가운데는, 안식일에는 새치(흰머리)를 뽑아서는 안 된다는 규례가 있었다. 그것은 율법의 정한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그 규례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거울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거울을 보는 것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다 새치를 보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뽑을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새치를 뽑아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규례에 거울을 보지 말라는 울타리율법을 만들었다. 613개의 율법에 2천여 개의 울타리율법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지금도 새롭게 정해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못해 도를 넘는다. 이런 사람들이 도대체 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는지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유대인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린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린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린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자신들에게 손해가 된다는 무의식의 작용이 어쩌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사회는 근본적으로 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가난한 유대인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가진 자들은 그런 유대인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을 먹여야 했고, 그들도 안식일 규례와 정결예식을 지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그것이 싫었고, 대신 그들은 안식일 규례와 정결예식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자신들로부터 떠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린 셈이 된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린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한 자매요 형제여야 할 유대인들이라는 하나님의 가족을 부인한 처사였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안락을 위해 율법을 곡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은 물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와 사명을 부인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인간적으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러한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율법학자들과 ㅏ리새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위선자”였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돈의 노예, 혹은 맘몬의 신자가 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빠졌던 똑같은 올무에 빠진 것이다.
현실(돈)이 가지는 절대적인 힘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다. 그 힘에 굴복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을 말하고 돈을 미워하라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마 6: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