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을 통해 우리는 “남 탓”의 진면목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남 탓”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인간인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무한히 관대하며 남에 대해서는 옹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사실은 자신의 완벽성을 주장함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완벽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은 아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을 폭력이나 다른 어떤 수단으로 깨는 일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신적인 치명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초반에 반드시 성립되어야 할 훈육, 혹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윤석열은 그 과정에서 실패한 사람일 것이다. 부모가 지나치게 옹호 일변도였거나 타고난 윤석열의 성품이 절대로 꺾이지 않는 막무가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부모는 아이에게 그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했다. 그의 그런 태도는 그의 자세에서 나타난다. 늘 거들먹거리며 걷는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이 기본이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분노를 표출하고, 자신에게 복종하는 이들만을 탱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자아가 하는 일이다. 누구건 돈이나 권력을 가지면 폭력적이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리는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폭력적이지 않고, 권위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사람의 철학(인생관)에 대한 절대성은 폭력적이거나 권위적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은 “남 탓”을 하지 않을 뿐 자신에 대한 절대성은 여전하다.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중심을 보실 수 있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는 것과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말하는 신앙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절대성을 부여하면서 자기 자신의 절대성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비합리적인 것이라도 절대성을 지니신 하나님께는 따질 수 없다. 물론 순간적으로 저항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지속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성이 의미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절대성을 돌려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교회에도 들락거리고, 절에도 드나들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절대성을 돌려드리지 않는다. 그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지존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종교인들이나 특히 무속인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자신의 절대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나 특히 무속인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참람한 결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것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남 탓”은 절대적일 수 없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려 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이 유독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 탓”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네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절대성을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동차에도 부착하고 다니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 “내 탓이오”가 그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매우 영적인 내용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겸손한 인간의 태도이며 영적인 삶의 자세인가. 잘 생각해보라. 한 번 더 생각해보라.

“남 탓”이 절대성을 주장하는 교만한 인간의 특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내 탓”임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일례로 암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린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그것이 자기 탓인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생의 모습일 따름이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마 6:27)

이 말씀에는 인간의 실존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 수명을 단 일 초도 자신의 능력으로 늘릴 수 없다. 예수님은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필요를 하늘 아버지께서 아신다는 말씀과 함께 이런 결론을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34)

인간이 하루살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돈이 권력을 가지면 한 순간 인간은 착각에 빠질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탓”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남 탓”을 하는 것보다는 “내 탓”을 하는 것이 겸손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어떤 면에서는 영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 탓”을 하는 것으로는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내 탓”을 하는 사람의 자아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 16:24)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인간은 “탓”으로부터 해방된다. 우리는 탓하지 않는 인생을 마리아에게서 볼 수 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순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쁨과 슬픔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삶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남 탓”을 해서는 안 되지만 “내 탓”임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자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사로 받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임과 동시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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