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가 가장 힘든 것은 만남의 단절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공동체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공동체는 복음적인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톨릭의 경우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수도원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치할 수 없다. 하지만 가톨릭은 그것을 이유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나는 그리스도교 역사가 갈라짐의 역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떤
한 수업에서 그날의 주제는 “장애와 느림”이었다.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작은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 “우리 잠시 느림을 체험해 보자”고 말하고, 강의실이 있는 제법 큰 빌딩 안에서 20~30분 동안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 보라고 했다. 천천히 걸어도 되고, 멈춰 서 있어도 되고, 의자에 앉아 쉬어도 된다고 마음으로는 생각했지만, 의도적인 안내는 따로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조용히 지켜보았다.곧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학생이 눈을 바닥에 둔 채 아주 느린 걸음으로만 빌딩 안을 돌아다니
성령을 받으면 ‘봄’이 열립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니고데모는 신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3가지를 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 둘째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하심, 셋째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님의 표적임을 보았습니다 요3:2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셨습니다 요3:3 즉 니고데모 가 신실한 종교인으로 많은 것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현상을 잘 보았지만, 그 현상의 뿌리가 되는 본질계는 보지 못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봉사를 요구할 때 접근하는 방식이 대체로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식인데, 이는 봉사를 믿음과 연결하여, 봉사하는 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봉사하지 않는 자는 제대로 된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함으로써 성도의 내면적 죄책감과 열등감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은 겉으로는 헌신을 끌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봉사를 은혜의 기쁨이 아닌 심리적 압박과 체면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성도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 위한 봉사’를 하게 된다.두 번째는 자아를 부추기는 방식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되게 하심이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제도 조직 이념 등으로 하나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유기적 조화이다.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성경은 몸의 하나됨으로 표현한다 (고전12:12-27 ‘몸’19회) 더 이상 더 적절함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표현이다. 말 한마디 하는데 우리의 650개 근육 중 72개를 움직이지만 하나도 의식하지 않고 몸의 자율적인 조화로 이루어진다. 우리 몸의 신묘막측함이 하나님의 신비이다 (몸=우주)이러한 신비로운 하나됨을, 성령님은 단절되어 성격도 기질도 성향도 다른 개체들
어느새 세상은 디지털이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니라 ‘거주자’로 살아간다. 예전의 디지털은 도구였다. 필요할 때 켜고, 필요 없을 때 끌 수 있는 외부의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손안의 장치가 아니라 몸의 연장이고, 네트워크는 사회의 배경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이 되었다. 우리는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며’ 산다. 메일함과 일정표가 우리의 하루를 결정하고, SNS가 인간관계의 무게를 정하며, 검색 알고리즘이 우리의 생각과 욕망을 미리
우리는 일하는 법은 배웠지만, 멈추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성과는 많아졌지만, 그만큼 불안도 커졌다. 하루가 얼마나 ‘가득 찼는가’로 자신을 평가하고, 텅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생산성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이자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생산성’이라 부르고 있는가이다.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생산성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옳게 이다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하라고 재촉한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성취하라고.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아질수록 마음은 비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위해 살 수 있을까?만일 이 질문에 'No’라고 대답한다면 그가 누구이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면 ‘Yes'라고 대답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일까? 나는 그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헷갈릴 것이다. 'No’도 아니고 ‘Yes'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맞다.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No’라는 대답도 ‘Yes'라는 질문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No’라는 것을 알면서도 ‘Yes'라고 대답한 것처럼 사는 사람이
"안 믿는 직원들 예수 영접하라"기사를 읽다 눈에 들어온 내용이다. 극우로 알려진 넥스트클럽이라는 곳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이 기사화되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개신교를 견인하는 것은 4영리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지의 표명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4영리와 같은 전도방식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한 부
성경을 그 흐름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성령‘하면 만인 제사장설이 떠오를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증거 한다 행2:16-21요엘 선지자는 제사장이 중보해야만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 할 수 있는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모든 육체가 성령을 받아 누구든지 하나님과 직접 교통 할 수 있는 영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 하였다 욜2:28-32예수님은 자기 육체로 성전 (하나님과 백성이 단절되어 있는 자리)을 폐하심으로 (휘장이 찢어져 막혔던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여시고 마27:51) 하나님과 사람의
성령님에 대한 글들은 천편일률적이고 (어지러운 명칭 기능 정의 등) 논리적인 정리임에도 실체가 혼미하다대표적인 논쟁이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사도시대로 끝났느냐 현재에도 진행 중이냐 하는 것인데, 논쟁 자체가 어리석다초자연적 역사란 평면인 현상 세계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현상 속에 본질의 입체 (너비 길이 높이 깊이의 충만 엡3:19)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계속되는 성령님의 역사이다.문제는 오순절운동으로 시작된 은사운동 (charismatic movement)이 초자연적 역사가 아닌 지극히 현상적인 일들을
목사가 된 이후 나는 다른 교회에 가서 하는 설교나 집회에서 돈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그것은 모든 교회가 공교회로서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도였다.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관습이라는 오랜 전통이 교회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방은 미리 돈을 준비했고,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막무가내로 내게 그것을 주었다.그럼에도 나는 그런 쓸데없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돈을 받지 않은 경우가 더 적었지만 최소한
죄인은 구원 받지만거짓은 구원이 없다복음서의 죄인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즉 죄인됨에 은혜를 구함으로 모두 구원 받았다. 그러나 거짓은 자기중심의 자기 맘대로의 세계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요8:44마귀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속여 죽음을 향하는 참 자아(나됨)을 죽이고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거짓 자아(에고)로 전락 시켰다. 현상의 죽음은 물질의 소멸이니 물질에 광분하는 삶이 되어, 사탄의 말대로 생명을 물질로 바꿨다 욥2:4 생존을 절대화 시켜 생존 세계의 왕인 자기에
먼저 지난회와 오늘 나눔의 핵심을 요약합니다죽음 I : 죽음은 현상의 한 부분, 실재가 아니다. 사탄은 죽음을 절대화시켜, 죽음권세의 영구화를 시도 but 하나님께서 막으셨다죽음 II :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거짓이다 생명을 폐하는 것은 죄아니라 거짓이다 마귀 거짓의 핵심은 ‘죽음‘에 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4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존을 절대화 시켰다. 죽음을 생명처럼 절대화 시켜 죽음이 생명의 반대가 되었다. 따라서 마귀는 생존세계 (물질세계)를 주관하는 신으로 등극하여 하나님과 같아지려 하였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을 완전히 반대로 보는 것의 폐해를 지금 목격하고 있다. 작금의 우리의 정치 상황이다. 똑같은 것을 놓고 그것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반대다. 민주당은 이재명 정권을 윤석열 정부가 와해시킨 대한민국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국힘당은 이재명 정권이 빠르게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국민들 역시 즉각적으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느 한 쪽에 동조하게 된다. 정치가들은 물론 국민들 역시 둘로 갈라진 것이다.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달라진 이러한 현상을 보고 그
어제 한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대화 중 믿음이 다른 경우는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인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러지 않는다. 믿음은 다른 것이다. 믿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믿음은 과정이고 그리스도인은 과정적인 존재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같을 수가 있는가. 어제는 같았던 사람도 오늘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어떤 이들은 중요한 골자만 같으면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경우에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아무리 내가 그런 생각을 해도 현실에서는 만남
우리는 흔히 건강을 병이나 질병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혈압이 정상이면 건강하고, 아프지 않으면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성경의 건강은 결함이 없는 몸이 아니라, 하나님과, 타인과, 자기 자신이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 곧 “샬롬”의 상태다. 폴 틸리히 (Paul Tillich)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건강이란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자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의 상태다.” 즉, 건강은 생리학적 완벽함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의 조화인 것이다.예수님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리듬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며, 세상의 광폭한 속도에 맞서는 가장 조용한 저항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멀리, 더 많이, 더 빨리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간다. 쉬는 법을 잊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이 살아 있음의 증거라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쉼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이 아니라, 멈춤 그 자체에서 새로워지는 삶이다. 멈춤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향해
죽음에 관하여 살펴 보자성경적으로 죽음은 현상이다. 즉 실재가 아니다.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현상 이전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꽃이 피면 아름다움을 본다. 그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꽃의 생명(본질적 실재)이 현상화 된 것이다죽음은 현상 상태의 변화이지 본질적 변화가 아니다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공로는 물질보다 의식의 선재를 증명한 것이다. 그 유명한 더블슬릿 실험에 의하면 의식(관찰) 할 때에 물질화가 일어난다. 관찰 전까지는 가능성의 수프(단절된 개체가 없는 서로 얽힌 확률성의 세계)로 있던 본질에서 개체화(알갱이)가 생겨,
우리는 어느새 절반으로 잘려 나간 채 살아가고 있다. 일에 몰두하며 성과를 쫓고, 관계를 이어가며 하루를 버텨내다 보면 남는 것은 언제나 ‘해야 할 일의 목록’뿐이다. 그렇게 하루가, 또 한 해가 지나간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고 말을 하지만, 마음은 점점 감각을 잃어 간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따라오지 않고, 성공을 이야기하지만 좀처럼 기쁘지 않다. 살아는 있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절반으로 축소시키며 살아간다. 그 이름이, 반쪽짜리 인간이다.더 이루고 싶은 욕망, 더 잘하고 싶은 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