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김건희 여사께서 특검에 출두하며 하신 말씀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황제조사가 떠오른다. 검사들이 핸드폰까지 압수당하며 굴욕적인 조사를 해야 했던 김건희 여사가 느낄 굴욕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김건희 여사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묘사하며 사과를 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김건희 여사께서는 자신의 이전 발언대로 천기를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겸손하신 그의 발언은 단순히 전광훈 추종자들이나 엄마부대와 같은 길거리파들을 자극하기 위한 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이번에도 나는 “예수의 指紋이 스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妙手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가끔씩 예수의 지문이 스친 것 같은 말이나 지혜가 작동되곤 한다. 잘 보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일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나는 세계 곳곳에 있는 공동체들에서 그것을 보곤 했다. 그런데 김건희 여사의 발언을 보고 똑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출 3:2)
모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런데 모세가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가. 아니다. 모세는 불세출의 걸출한 영웅이었다. 그의 학문과 무예는 뛰어났고, 그의 지위 역시 황제 서열 2위의 왕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일컬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아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정말 자신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삶은 정확하게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의 그는 대단한 사람(Something)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동족을 학대하는 애국의 관원을 쳐 죽인 후 매장했다. 결국 그 일로 그는 애굽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의 양치는 목동이 되고 데릴사위가 되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Nothing)이 되어야 했다. 대단한 사람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하는 그 시간은 그에게는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잉어를 대야에 가두어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자신이 대야에 갇힌 잉어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피라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모세에게 가장 큰 은총의 시간이었다. 그는 작아져야 했고, 마침내 작아졌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우리는 어떠한 경우도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 40년이란 긴 시간은 그가 늙어 죽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대수는 바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모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정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서열 2위의 바로 후보자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모세이기에 부르셨다.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능치 못함이 없는 사람(Everything)이 되어 이스라엘을 이끌다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채로 주님께로 돌이갔다. 이것이 모세의 삶의 3막이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꾼들의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윗도 아둘람에서 살아야 했고, 바울도 오래도록 아라비아 광야에서 살아야 했다. 나아만의 이스라엘 여종도 포로로 잡혀가야 했고, 예수님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내어놓은 것도 한 작은 소년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셨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5-8)
얼마나 분명한가. 예수님께서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셔야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새로운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다. 성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그 결과를 이렇게 우리에게 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9-11)
성서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바로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다. 낮아지라는 것이다. 비우라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잘도 이 사실을 ‘케노시스’라 해석하면서도 그 사실을 아는 우리 시대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Something)으로 인식한다. 그런 사람들은 가르치려 하고 사람들은 물론 한 시대를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황당한가를 아는 이들은 없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한사코 높아지고, 더 많이 채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일탈에 일탈을 거듭하고 망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들(Nothing)의 나라다. 작은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작은 자라야 그곳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인 그리스도인들은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한다. 인간인한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작게 만드시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느라 여념이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사라진 것은 이처럼 모두가 큰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이라는 단어는 가장 절묘하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할 그리스도교 안에서 교황이라는 단어만큼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변질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내 말에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자신에게 질문해보라.
교황이 큰 자인가, 작은 자인가?(개신교는 오히려 이보다 더 참람하다. 교황이 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수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교황처럼 군림하는 담임목사를 생각해보라.)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26-29)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김건희 여사는 신기가 있는 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분은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없는 큰 자이시다. 그래도 “예수의 지문”과 하나님 나라를 묵상할 수 있게 해주신 그분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