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 부부가 베트남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비즈니스 석을 탔다. 평소보다 일찍 공항엘 갔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과 가벼운 음식을 무료로 제공해준다고 했다. 푸꾸옥에 도착해서 머문 곳은 오성급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니 직원들의 태도가 너무 정중했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다녀와 한 말은 “역시 돈이 좋다”였다.
그렇다. 돈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살맛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된다.
돈의 노예라는 말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다.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되던지, 하나님의 노예가 되던지 둘 중 하나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대부분 그렇게 된다. 하지만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는 없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돈의 주인이라는 사고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이 돈이 하나님에게만 있는 전지전능에 대적하는 수단이다. 돈은 인간의 자아를 부풀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경성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여지없이 돈의 마수에 말려들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가도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향해 떠나는 이들이 있고, 성서는 그것을 기록해놓았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딤후 4:10-11)
데마와 그레스게와 디도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갔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바울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영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예로 살아가는 길을 벗어나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길로 간 것이다.
언뜻 이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왜 그들이 이 세상을 사랑했는지 그 이유를 묵상해본다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난 이들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좌절시킬 수 있다. 이 세상의 높은 파고는 얼마든지 그리스도인들을 난파시킬 수 있다. 위에 열거된 세 사람들이 그렇게 난파한 이유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예가 된 사람은 가난해져야 한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라는 주장을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일 뿐이다. 성서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 6:20)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복을 거절한다. 그런데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하나님 나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약간의 위로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흔적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가난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일에 성공해도 아무도 주목하거나 인정해주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복으로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당연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 된 하나님 나라를 보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래 전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의상>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의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내용을 읽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것을 알게 해준 것 역시 가난이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대성당의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된 거장들의 예술품들을 그 예로 들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지만 거장인 예술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걸작을 만들어 그곳에 두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보실 수 있는 곳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예로 든 것이다.
가난이 어려운 것은 단순히 필요를 해결할 수 없고, 더 좋은 것을 즐길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가난은 사람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나는 그것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우리 교회에서는 해외여행과 같은 먼 곳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백 불이 든 봉투를 준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돈이다. 하지만 그 봉투를 받은 사람들이 그 돈을 도로 가져와서 하는 말은 자기가 다니는 길에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 역시 오래도록 가난하게 살면서 그 사실을 거듭 느끼고 또 느껴야 했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 대부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내 글과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나는 그런 나를 힐책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왜 그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난한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의상을 입으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곧 내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음대로 만나고 버릴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의상을 입으려면 자신이 먼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거절하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 그들이 받은 복 역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은 그러나 깨닫기가 심히 어렵다.
나는 최근에 수해를 입은 지역에 살고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얼마 전 큰 산불이 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참았다.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한다. 그래서 나서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께서 그분들을 지키시고 돌보아주실 것을 간구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미 6:1-4)
하나님의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