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김동윤 장로 인터뷰
독립운동가의 피, 가난과 추방명령, 그리고 ‘청지기’로 살아온 한 신앙인의 고백
“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10월 19일 평신도주일,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강단에서 설교한 김동윤 장로는 시편 139편 16절을 붙들고 이렇게 고백했다. 예배 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고비들을 조용히 더듬어 가며, “내 인생의 시작도, 과정도, 끝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믿음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제 장인·장모님은 독립유공자입니다”
김 장로는 신앙 이야기에 앞서 먼저 가정사를 꺼냈다. 그것은 그의 신앙관과 가치관의 뿌리를 이룬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제 윗세대, 그러니까 부모님과 장인·장모님까지 합치면 양쪽 집안 모두에 독립유공자가 계십니다. 특히 장인·장모님 두 분은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서훈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장모는 일제강점기 당시 지하조직 ‘석광회’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의 활동은 동아일보에 ‘유부흥 체포’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전주여고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이화전문 진학의 꿈도 접어야 했지만, 그는 사회복지 분야로 방향을 틀어 중앙보육에서 일하며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도 사람을 돕는 삶을 살았다.
김 장로는 장모를 이렇게 기억한다.
“지금도 장모님을 떠올리면 ‘뼛속까지 독립군’이셨다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일본말 쓰는 것도 끝까지 불편해하시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서서 돕던 분이었습니다.”
장인 역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일제의 탄압을 겪으며 평생 천식으로 고생했다. 두 분 모두 대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고, 민족과 역사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장모는 말년을 시카고에서 보냈고, 마지막 소원은 “조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 장로는 시신을 화장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한국으로 모셔 장인 곁에 나란히 안장했다.
“비행기 안에서, 국립묘지까지 모시는 전 과정이 제겐 하나의 의식 같았습니다. 한 가정의 아픈 역사와 영광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간 속에서 정리해 주신 느낌이었습니다.”
신앙의 출발점을 묻자 그는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라고 답했다.
“교회는 어릴 때부터 ‘안 가면 안 되는 곳’이었어요.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 술 마시고 토론하다 들어와도 주일이면 꼭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아, 성령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구나’ 하고요.”
그는 아버지를 통해 신앙의 윤곽을 배웠다. 아버지는 은행 지점장이었지만 늘 빨간테 성경책을 들고 버스를 타고 교회를 찾았다. 부정과 편법을 철저히 거부하던 그의 모습은 훗날 김 장로의 신앙과 직업윤리의 뿌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취업의 문이 막히자 방황했다.
“철학과 출신은 회사에서 잘 안 뽑던 시절이었습니다. 신문기자 시험도 봤지만 떨어졌죠. 어머니께 용돈을 달라며 실랑이하는 것도 매번 힘들더군요.”
그러던 중 처남의 조언이 있었다. “외무고시 준비하는 것보다 미국 유학을 가라.”
유학을 위해서는 문교부 유학시험이라는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했는데, 군대에서 틈틈이 공부했던 것이 도움이 되어 그는 시험에 합격했고 휴스턴 대학으로 떠났다.
휴스턴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가난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제 유학을 위해 단 한 푼도 지원하지 못하셨습니다. 은행 지점장이었지만 부정한 돈을 벌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아들 유학 보내자고 도둑질하라는 말이냐’며 어머니와 다투실 정도였어요.”
그러던 중 아내가 임신중독증으로 쓰러졌다. 무료 클리닉에서는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했고, 부부는 절망에 빠졌다. 그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내셨다. 유대인 의사 데이빗(David)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병실을 찾으며 아내를 돌봤고, 결국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인큐베이터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퇴원 후, 의사는 성경책 한 권을 건네며 속지에 글을 남겼다. “이 아이가 자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너희를 지키셨는지 꼭 들려주라.” 김 장로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은혜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병원비 문제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었다. 그는 당시 ‘데니스(Denny’s)’에서 버스보이로 일하고 있었는데, 사정을 알게 된 매니저가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그의 회상은 간단하지만 깊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직접도 일하시지만,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유학 중 한 번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알루미늄 중개업을 시작했는데, 학교 측이 그를 ‘사라진 학생’으로 보고 이민국에 신고한 것이다. 추방명령이 떨어졌고, “2주 안에 미국을 떠나라”는 통보가 내려졌다.
그는 이민국 사무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고, 한 직원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3개월 유예를 허락했다. 3개월 후 그는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어 캐나다로 향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 다리를 건넜지만, 캐나다 이민국은 그의 입국을 난감해했다.
그곳 좁은 방에서 그는 생애 가장 절실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제 욕심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만, 기회를 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그날을 통해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은 장모와의 작은 ‘계약’이었다.
장모는 미국에 와 그의 생활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6개월 동안 생활비는 내가 책임질 테니, 자네는 공부만 하게.”
그는 일을 내려놓고 공부에 집중했고, 장모는 주변 도움까지 모아 그의 가족을 6개월 동안 지원했다. 김 장로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고, 3일간 치르는 CPA 시험에 한 번에 합격했다. “그 6개월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지금까지 40년 넘게 회계사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광고를 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주셨고, 저는 맡겨진 사람에게 정직하게 일하려고만 했습니다.”
CPA로서의 안정은 자연스럽게 ‘청지기 사역’으로 이어졌다. 『돈 다스리기』, 『예수님, 나도 돈이 좋아요』 등 성경적 재정관을 다룬 책을 쓰고, 한국과 미국에서 2,500명 이상의 목회자들에게 세미나를 진행하며 그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을 전했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과테말라에서 백내장 수술을 기다리는 농부들을 직접 보고 돌아와 6만 달러를 헌금한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눈을 뜬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돈은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김 장로는 지난 40년 동안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에 파송하셨다고 믿습니다.”
교단 갈등과 분열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붙들었다.
“이 교회의 머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한,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믿었다.
평생의 신앙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달라는 요청에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신앙은 인생의 주체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감사 일기를 쓰며,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자기 레인’에서 하루하루 성실히 걷는 삶. 그는 이를 “성령을 따라 습관처럼 걷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시 설교 첫 문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도 매일 아침 읽는 기도문을 조용히 읊조렸다.
“하나님, 저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저를 만드셨습니다.
오늘도 저를 이끄시고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자리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제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내 인생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구나’ 하는 작은 위로가 된다면 충분합니다.”
그의 고백은 결국 한 줄로 모인다.
“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