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목사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산수영로교회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의 설교자로 나선 오정현 목사의 설교 내용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선거운동이었다며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해서 김문수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했다. 손을 들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도중에 나와서 내게 전화를 한 것이라고 했다. 아들이 같은 교단 소속 목사가 아니라면 현장에서 항의를 했을 거라고 했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반대는 개신교의 금과옥조처럼 된지 이미 오래다.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인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목슴을 걸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내게도 익숙한 일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분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했다. 주제가 잠시 동성애가 되었다. 그분은 만일 동성애가 허용된다면 아들을 어떻게 군대에 보낼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고, 동성애자들에 관한 증오를 표출하기도 했다. 동성애가 허용된다면 길을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들었지만 그분의 주장들이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분은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다시는 내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내겐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차이로 친밀했던 사람들과 멀어지는 일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내 일상이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티 크리스천이 되었다. 물론 나는 내가 안티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안티 크리스천이 아니라 참된 예수의 제자로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런데 그런 내 삶이 현실에서는 정 반대로 드러나고 있다.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한 내 감정은 슬픔이다.

그럴 때 나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안티크리스천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나를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여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사고를 바꿀 수는 없다. 물론 나는 굳이 그런 주제를 소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흘러나오는 차별과 배제의 방식을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의 결과는 소외다.

물론 상대방들은 그것이 소외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는 것이며, 가난하게 사는 내가 불편한 것을 그렇게 해소하기도 한다. 내가 무슨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가난한 나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할 때가 더 곤란하다. 내 부족함은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다. 나는 그것을 믿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거기에 더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평화를 누린다.

그래도 과거에 친밀했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없거나 멀어지는 것은 가장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수록 나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 물론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처럼 살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현실 속에서는 이상한 일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내 편에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대방 역시 내가 깨달은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 일이 정말 어렵다. 무엇보다 가난을 필수로 여기고 환란을 감사하는 삶은 모두가 피하려 할 뿐 그것을 감사로 받기란 불가능하다.

이 모든 일들의 기저에는 사랑의 문제가 자리한다.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이 그리스도교다. 하지만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은 자기들에게 가능한 그리스도교를 만들어냈다. 불완전하지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의 적은 사랑 없이도 내부결속을 이루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이단이 창궐한 것은 실제로 이단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단은 사랑 없이 내부결속을 다질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혐오로 내부결속을 유지하는 그리스도교가 된 것이다.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과 같은 것을 필두로 혐오와 배제는 그리스도교 유지의 가장 현저한 기재가 되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화의 사람들이 되라고 촉구하셨다. 바울의 편지에서도 동일한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일이 현실 속에서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칠 수 있는가. 평화를 위해서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오늘날 대세인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반대의 행렬에 동참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모순처럼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내 입지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한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이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상대방은 내게 다가오기조차 싫어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것이 내 현실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황당한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도다. 나는 기도할 수 있다. 내가 만나서 사랑할 수 없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다. 생각해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달라는 불효를 행한 후에 자신을 떠난 아들을 잊지 않는다. 날마다 높은 곳에 올라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오는 거지꼴을 한 아들을 향해 달려가 포옹한 후 그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 반지를 끼워주고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다.

기다림과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다릴 수 있고, 나는 기도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속에 평화를 간직한 채 평화를 도모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에게 이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각할수록 어렵다. 그래도 나는 반드시 그 길을 가야한다.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틀렸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고, 그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이 생각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벧후 1:3-7)

생각해보니 이 말씀이 바로 혐오와 배제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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