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행동은 낙인을 찍어 인간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이 사실을 보아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노예제도는 최소한 법적으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금지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노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한 외국인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고용주는 사실을 안 후 경찰에 고발하면 이직을 한 것으로 간주해 불법 체류자가 될 것이라는 엄포를 놓으며 사건을 은폐하기에 바빴다. 실제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도 억지에 의해 합의한 것으로 연출된 모습을 보고 조사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피해자가 정식으로 고소를 한 후에도 회유와 협박은 물론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한결같았다.

폭행을 당한 외국인 노동자는 실제로는 단순한 고용자가 아니라 노예였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가 당하는 모든 일들은 노예들에게나 가능한 일들이다. 그렇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노예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회는 그것을 용인한다.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잔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낙인찍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들의 주장은 그렇게 명확하게 낙인을 찍어야 자신이 안정되게 살 수 있다는 가짜 사실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비인간화로서 그 주체는 돈이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돈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들을 구태여 들지 않아도 그 사실은 너무도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저항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실시된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 노동자들과 사회 약자들의 편에서 이야기하는 후보가 있었다. 권영국 후보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 같았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만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고,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우리 사회를 위해 바람직한 제안들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는 어느 한 순간 속 시원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이미 세상이 주장하는 비 인간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한 우리 사회의 인식만으로도 모자라 차별과 배제를 주장하는 곳이 되었다.

차별금지법 제정되면 성범죄자가 초등학교 수위를 해도 막을 수 없다!

이 사실은 가짜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가짜 뉴스들을 만들어 이미 처벌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행위의 대가를 치른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어 영원히 복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장은 매우 극단적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런데도 핏대를 올리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매우 정의로운 것처럼 자신감을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전과자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사람들에게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는 그런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묻고 싶다.

그런데 낙인 찍기에 선봉에 서는 사람들이 목사들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거의 대부분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 같은 사람은 그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느냐고. 그리고 전과자들이나 성소수자들이 원수냐고.

낙인 찍기는 모든 문명의 공통된 특징이었고, 그 결과 모든 문명은 “희생의 체제”였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희생양들을 토대로 한다.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을 짓밟고 사치와 허영을 누리는 것을 당연한 것을 넘어 정의로운 것으로 여기는 곳이라는 의미다. 앞에서 소개한 외국인 노동자의 사건을 보라. 불의한 자가 누구인가. 폭행당한 것을 고발 고소하는 것이 불의인가, 그것을 없는 일로 만드는 것이 불의인가.

나는 이것을 보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향해 편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편향성을 통해 진정한 정의인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서 이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큰 희생을 실천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나는 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희망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낙인 찍으려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할 자매와 형제들이라고 하는 복음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을 간직한 채 실천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무의미함을 넘어 불의한 것이 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 반대에 목숨을 거는 목사들을 통해 그렇게 불의한 복음이 된 복음을 보고 있다.

“내 양 떼를 먹여라.”(요 21:17)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눅 10:37)

복음은 우리에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그 행동의 대상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심지어 그것으로 우리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이 사실에 주목하는 이들은 없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낙인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이런 낙인 찍기야말로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시금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낙인 찍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경쟁에서 지거나 낙오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장애를 지닌 사람들, 낙인이 찍혀 더 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기쁘게 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될 의향이 있습니까?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낙인을 찍으려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이 낙인 찍은 사람들을 돌보려는 사람인가를 보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낙인찍은 사람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아니라 이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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