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업에서 그날의 주제는 “장애와 느림”이었다.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작은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 “우리 잠시 느림을 체험해 보자”고 말하고, 강의실이 있는 제법 큰 빌딩 안에서 20~30분 동안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 보라고 했다. 천천히 걸어도 되고, 멈춰 서 있어도 되고, 의자에 앉아 쉬어도 된다고 마음으로는 생각했지만, 의도적인 안내는 따로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곧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학생이 눈을 바닥에 둔 채 아주 느린 걸음으로만 빌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거의 온통 “내가 지금 얼마나 느리게 걷고 있는가”에 쏠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학생은 거의 없었고, 잠시 멈춰 서는 이 또한 없었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의자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그들의 느림은 몸의 속도만 줄어들었을 뿐, 시선도 마음도 여전히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느림 같아 보였다.

그 장면을 보며 알게 되었다. 우리는 느림을 거의 언제나 속도의 문제로만 이해한다는 것. 느려지면 뒤처질 것 같고, 손해를 보는 것 같고, 게을러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마음은 여전히 조급한데, 그 위에 억지로 브레이크만 밟으려 한다. 그러니 느림이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의 느림은 우리를 쉬게 하지도, 깊어지게 하지도 못한다.

진짜 느림은 속도가 아니라 주의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발걸음을 늦추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들어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이다. 옆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복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한 번 더 느끼고, 내 안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을 잠시 붙들어 보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곳”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이 순간”에 닿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도 결국 이런 느림과 닮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하기보다, 멈추어 기억하고, 우리가 누구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초대하신다. 예수님 역시 뛰지 않고 걸어 다니시며, 군중 전체보다 길가에 서 있는 한 사람을 위해 발걸음을 멈추셨다. 느림의 가치는 바로 여기 있다. 할 일의 목록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성과가 아니라 관계에, 내일의 계획이 아니라 오늘 숨 쉬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다시 자리를 내어 주는 힘. 빨리 걷는다고 해서 덜 늦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속도를 조금 늦출 때, 정말 소중한 것들에는 늦지 않을 수 있다. 느림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나를 소모시키는 속도가 아니라, 나와 너를 살리는 속도를 고르는 일이다.

이영길 교수 / <칼빈대학교>, '나는 홀가분하게 살고싶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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