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가 가장 힘든 것은 만남의 단절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공동체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공동체는 복음적인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톨릭의 경우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수도원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치할 수 없다. 하지만 가톨릭은 그것을 이유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리스도교 역사가 갈라짐의 역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리스도교는 갈라지고 또 갈라진다. 하지만 갈라짐에도 순기능이 있다. ‘디아스포라’의 역할이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내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놓으려 한다. 비록 내 곁에 단 한 사람도 남지 않더라도 그것을 내 부족의 증거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신의 진정성을 추구하며 서로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실 수 있으시다. 하지만 이 사실이 맘몬의 신전이 된 교회까지 이해하고 용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심판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내 신앙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기 결박이다.

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나는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했다. 이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개입 속에서만 내 인생이 이해된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나만의 것으로 객관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이해가 불가능한 내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들 스스로 복음에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 내 삶의 의미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이 대답하였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행 26:29)

바울의 이 말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까? 정말 바울의 이 말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바울과 같아진 사람이 있었을까?

적어도 바울의 말의 직접적인 청자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바울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는 있어도, 바울의 말대로 바울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주체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 됨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의 주체는 각 사람 개인이 아니라 성령이다. 그런데 성령의 특징은 바람과 같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갈라짐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성령을 무력하게 만드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내게 일어난 고립의 현상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이해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이 절대적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스스로 무엇을 도모하는 순간 그것은 내 일이 되어 사람의 일이 되고 만다.

나는 어제 추수감사절 설교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감사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내 마지막 호흡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되게 하소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지 못한다면 죽은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숨을 내쉬는 행위는 생명의 마지막 현상이다. 그 마지막 호흡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누구의 인생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건 어떤 죄를 저질렀건, 혹은 반대로 어떤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왔건 간에 그 마지막 호흡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내게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실감나게 해주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비시오’의 신앙인지도 모르겠다. ‘비시오’의 신앙은 세상을 은혜로운 곳으로 보는 방식이다. 갈라짐과 같은 결정적인 부정적인 일까지도 은혜로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모든 인생이 감사한 일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죄수가 되어 결박되어 법정에 선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아마도 지독한 자가당착이나 아전인수라는 생각이 더 합리적이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이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모습은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이다. 그는 범사에 감사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자기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죄수가 되어 결박되기를 원하겠는가. 물론 그가 그것 이외에는 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바울 자신은 그렇게 결박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 모습으로 자신의 옳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바울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짓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 가운데 그런 역설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습적 지혜를 따르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철저하게 그런 인습적 지혜를 거스른다. 역설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래서 진리이고 결과적으로 바울과 같은 상태를 초래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역할과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는 바울과 달리 그리스도교 해체의 주장을 하게 되었다. 교회를 맘몬의 신전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곳곳에 교회를 세운 것과 반대로 나는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일일까. 물론 나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우는 일과 허무는 일은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다.

그래서 나는 갈라짐의 대명사가 된 나를 질책하지 않는다. 그렇다. 다르다. 하지만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모든 힘을 다해 내 길을 가면 된다. 성령이 나를 이끄실 수 있도록 나를 비우면 된다. 그래서 나는 민들레 홀씨가 늘 반갑다. 그것이 지금 내 삶의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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