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고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는 강남의 대형교회를 다닌다.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연히 2번을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누구를 찍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한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옆에 있어서 대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무조건 1번이다. 친구는 젊은 아내에게 꼼짝도 못한다. 친구는 자신은 무조건 1번을 반대한다고 했다. 이유는 없다고 했다. 친구는 내게 솔직하게 대답을 한 것이다. 이유가 없다. 다만 싫다. 친구는 그것을 느낌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의 분위기이기도 하다. 충청도에 사는 아내의 사촌동생도 탄핵반대 동영상을 보내와 아내가 연락을 끊었다. 그는 목사들에게 둘러싸여 산다. 대구에 사는 내 큰 매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영상을 보내왔다. 새벽 세 시에도 카톡이 울려 참다못해 끊어버렸다. 그래도 큰 매형은 이해할만하다. 김 문수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셨다.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다닌다. 그리고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2번을 지지한다. 그들이 2번 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공산화 되고 아예 나라 자체를 김정은에게 갖다 바친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유가 그럴듯하면 존중이라도 하련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걸 개신교의 한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런 인식도 복음적인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주제로 삼아보겠다.
어쨌든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 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공산화될 것이라는 공통적인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고가 얼마나 비 복음적인 것인지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가장 흥분하는 성서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는 품삯을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이 되니,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 20:1-16)
나는 이 비유를 볼 때마다 피가 들끓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포도원 주인과 같은 일을 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가능하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내가 불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모습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다. 모든 사람들이 이 포도원과 같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다. 특히 빈둥거리며 놀고 있다는 세상의 지탄을 받는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똑같은 임금을 그것도 가장 먼저 지급하는 주인에게서 나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한다.
이 내용은 공산주의를 넘어 완전이 거꾸로 된 사회를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할아버지 쯤 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런 곳이 바로 교회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행 4:32-35)
이 기사를 자세히 보라. 이건 정말 공산주의 독재가 아닌가. 하지만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모습이다. 다만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인들 각자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큰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놀랍게도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고, 더 놀라운 것은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이고, 바로 이것이 복음의 결과로서의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 나라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많은 신도가 신도 수만큼 여러 마음과 뜻이 되어 … 빈부격차로 기뻐하며 … 더 큰 땅과 집을 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 목사들은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며 …” 돈 많이 번 것과 성공한 것을 자랑하며 무엇보다. 시장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동의 소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라. 생각하나마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역시 생각하나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공산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나는 이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사망 선언임을 확신한다. 만일 교회에서 공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공산화를 두려워하고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오늘날 교회는 과연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같이 되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을 무엇에 비길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눅 7:31-32)
오늘날 예수님은 귀신이 들렸다. 그리고 그분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었다.
이제 나는 오늘날의 교회들을 바라보며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광야에서 썩지 않고 말라비틀어진 미라(미이라)처럼 되었다.
공산화가 두려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미라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