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형제애가 좋은 집으로 소문이 난 집이었다. 나는 그런 보호 속에서 자라났고,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특히 나이가 많이 차이가 나서 누나들의 남편 후보자들의 아낌없는 성원으로 당시에는 누릴 수 없던 여러 호사들을 정말 많이 누렸다. 바로 위의 형과는 정말 세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친밀한 관계를 누렸다. 하지만 이런 형제애는 사라졌다. 가장 위 두 분이 돌아가셨고 다섯이 남았는데 이제는 서로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관계의 단절이 우연히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제애의 단절을 통해 주님은 혈연관계의 절대성을 깨뜨려주셨다. 내게 일어난 어떤 일보다 이 일은 복음의 가치를 내게 입증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시작한 후 모든 재산을 잃고 완전히 나앉게 되자 자연스럽게 형제들은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거의 매년 모두가 모였고, 함께 여행을 다녔다. 그 모임이 사라졌고, 여행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형제들의 모임은 이어졌다. 이것을 가른 것은 가난이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가난의 무서움을 배웠다. 가난은 무섭다. 가난은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한다. 나는 노숙자들에게서 나는 냄새보다 가난이 더 지독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가난 속에서 나는 복음에 대해 눈을 뜨고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해지기 운동을 통해 확장된다. 하나님 백성은 가난을 통해 복음을 배우고 비로소 긍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된다.
내 인생을 통해 복음의 역설을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난예찬론자가 되었다. 물론 이 시대 어느 그리스도인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내용이다. 지금도 여전히 커지려는 내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난은 그런 나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한다. 가난한 나는 커지려야 커질 수가 없다. 이것의 은혜 중의 은혜라는 내 주장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작금의 선거 국면을 보라. 대통령 후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이 잘 살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처럼 노골적으로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 보자.”라는 구호는 아니지만 “경제”라는 이름으로 오늘날도 똑같이 울려 퍼지고 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잘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복음은 이와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지라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성서의 기사를 보라.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행 4:32-37)
초기교회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고, 그 이유를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기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설교하지 않는다. 다만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 성령의 역사였다는 내용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는 왜 그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는가.
어쨌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없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부동산 투기가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집이 여러 채라 그 중 하나를 판 것이 아니었다. 땅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소작농이 일반화되었던 때도 아니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것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없다. 특별하게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이나 수도자가 되려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있기도 하지만 평신도라는 그리스도교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생긴 이후에는 평신도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평신도의 사명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세상에서 돈을 벌어 교회에다 헌금을 하여 교회를 유지토록 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개신교의 경우는 “십일조를 가장 많이 하게 해주십사.”라는 기도가 가장 일반적인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복음이 사장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복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종교놀이”를 하면서 “구원 타령”을 하는 곳이 되었다.
성령은 이미 그런 그리스도교에서 촛대를 옮기셨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나 미친놈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내 역할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돈을 무시하거나 미워하지 못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가난하게 살기 운동이라는 사실을 외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교회다. 그러나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자매와 형제가 되어 서로 사랑하는 곳이 된다. 심지어 대신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곳이다.
목사가 되어 나는 그런 성령 공동체인 교회,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를 꿈꾸며 내 재산을 내놓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내 시도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보증을 잘못 서서 망했다고 말한다. 누구도 복음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복음을 망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난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가난해지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다시 말해 복음대로 살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성령은 그 사람을 온전히 보호하신다. 내가 바로 그 증거다. 나는 완전히 망해 무일푼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이유도 알게 되었다. 성령께서 내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깊이 깨우쳐주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을 글로 쓰게 하셨고, 오늘도 그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 주변에 자매와 형제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교회의 일원으로 수많은 자매와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