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의 모든 세포에는 DNA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그것은 우리 몸의 신비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은 전체 몸을 위해 희생한다. 어떤 세포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이기적이지 않다. 간혹 그런 세포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런 세포들을 암세포라고 한다. 암세포는 이기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두가 비이기적인 몸의 세포들 사이에서 암세포들은 빠르게 불어난다. 암세포들은 몸의 다른 세포들과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다. 그래서 몸이 죽을 지경이 되어도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암세포는 오직 암세포들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온 몸을 죽이는 결과는 낳게 된다.

나는 오늘날 교회들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암세포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생존을 염려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는 생존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전도를 한다. 사탕을 붙인 전도지를 나누어주거나 건빵이나 휴지를 붙여 나누어주기도 한다. 교회가 언제부터 전도를 위해 미끼를 사용했는가. 아니 근본적으로 언제 교회가 생존을 염려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암세포가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오늘날 교회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대부분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사실을 알려주어도 오히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을 공격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회들이 완전한 암세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 몸의 세포는 일정 기간 활동하다 사라진다. 세포는 소멸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자신들을 영원한 존재로 여긴다. 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몸의 세포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DNA가 없기 때문이다. DNA가 없다는 것은 곧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의 세포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교류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몰입한다.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소멸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을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인식하지 못함은 물론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오래 전에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교회를 공격하여 죽이지 않았다. 다만 교회들로부터 DNA만을 제거했다. 그래서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암세포들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암세포의 존재와 불어남은 전체 몸의 질병이나 생명의 위협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실 그 일은 사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탄은 오히려 교회의 생존과 존재 이유를 강화해주면 되었다. 결국 생존을 교회의 DNA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포들에 의해 새로워져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오직 DNA를 지닌 세포들에게만 가능한데 그것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생존을 위한 교회들에 주어진 DNA의 정보는 자신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

사탄은 이렇게 그리스도교와 교회라는 세포들의 DNA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을 조직으로 만들면 되었다. 조직은 DNA가 없어야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DNA는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조직이 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세포들의 DNA는 하나님 나라다. 그리스도의 몸의 세포들인 교회들의 DNA는 하나님 나라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 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 12:12-27)

이 비유는 너무도 적확하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위 내용에서 말하는 것처럼 되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무엇보다 서로 같이 걱정하지 않고, 한 지체의 고통을 다른 지체가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곳이 되었다. 오히려 크다는 사실로 다른 작은 지체들을 무시하는 구실로 삼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이유가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조직이 되었기 때문임을 알지 못함은 물론 인식조차 못하는 곳이 되어 유기적이어야 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권력은 물론 그 어떤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다. 그 어떤 강요나 억압도 존재하지 않는 생명의 나라다. 그러나 조직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라는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DNA가 완전히 사라진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권세가 되었고, 폭력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자발적인 동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명령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사망을 의미하지만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곳의 일원임을 스스로 자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오로지 구원 타령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로 자신들을 입증하기에 여념이 없다.

복음에는 따로 “사회적 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반응하기 마련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려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복음은 그것이 “공공선”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DNA를 가진 교회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 나라라는 DNA를 가진 세포들의 삶의 방식 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구제나 공동을 위한 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일 따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조직 아닌 유기체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버리고 교회를 조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직은 지배이여 그러한 조직의 통치수단은 폭력이다.

무엇보다 먼저 조직이 된 교회의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오직 유일한 생명의 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