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져서 커진 사람들”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역시 모세일 것이다. 모세는 작아져서 마침내 커졌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의 현상도 있다. 모세를 통해 작아져야 커지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드러나자, 작아진 것만으로 커졌다는 자의식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 속에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쫄딱 망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견디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역할과 존재의미에 눈을 뜨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커진다.

그렇다. 작아지는 길에도 오히려 커지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는 영성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작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아짐으로써 영성의 대가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작아진 자신의 모습을 망각하고 대가인양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함정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경성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다. 하지만 그 함정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면 된다. 자아가 부풀었다는 생각이 들면 즉시 그에 대응해야 한다. 결국 겸손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반복해서 그 과정을 겪고 있다.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성령은 그런 나를 계속 살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인정해주신다. 그런 일들은 내 인생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겸비하지 않은 순간 나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아마도 주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미 나는 버려졌어야 한다.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래서 내가 다시 겸손해지면 다시 나를 지지하시고, 내 갈 길을 가게 하신다. 줄다리기와 같은 이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 한 순간이라도 내가, 내가 되는 순간 나는 함정에 빠지고 교만해진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쉬는 순간 지향점이 사라지고 부인했던 자아가 부활하기 때문이다. 그 부활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현란한 변신이기에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의 예를 들면서 그들이 똑같이 기적을 경험하고 똑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물을 마셨지만 결과적으로 대다수가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시는 사람들이 되었음을 예로 들면서 결론적으로 위의 말씀을 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촐싹거리고, 나서기 좋아하고, 자신의 행위에 감동하여 자랑하기를 좋아하는가.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의 내용이 내 자랑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그것은 자랑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싶다. 그리고 말없이 복음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주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물론 그 일은 내가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용불량자이며 가난한 자가 된 내 곁에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소망하는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는 여전히 요원하다. 하지만 나는 내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만큼 확률 제로의 불가능한 일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고,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임도 명심하고 있다. 하루하루 내 삶을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아무런 권위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야기하고 글로 쓰고 있는 내용이 복음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복음이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가 나에게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다는 사실을 나는 늘 인식한다. 그래서 겸비해야 하고, 그래서 자발적인 동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내 글을 늘 읽었던 한 분이 노숙자를 발견하고 식사 한 끼를 대접해도 좋으냐고 물은 후에 돈을 드렸다는 내용을 적으면서 그것이 자기 자랑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글을 보았다. 그 일은 내가 나팔을 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나팔소리를 듣고 그분이 나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내가 바라는 바다.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되기를 바라서 빅 이슈와 같은 잡지를 사들고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만나면 그 잡지를 드렸다. 아마 대부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행동을 반복한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책을 받는 분도 나와 같이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분이 노숙자를 만나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내겐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내가 본이 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그것이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모습도 나의 모습과 같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의 릴레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다. 얼핏 생각하면 대단히 교만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그런 행위를 보고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것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게 본으로 이어지는 릴레이다. 설사 약간의 자랑이 섞여있을지라도 그런 일은 필요하다. 점차로 그 일이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런 주님이 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보호하심도 나는 늘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다. 아무리 파도가 흉용해보여도 결코 위험하지 않고,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부인한 자아가 부풀지 않도록 경성하기만 하면 된다.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자아를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하고 시선을 놓쳐서는 안 된다. 특히 성공의 자리에 이르면 언제라도 즉각적으로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이다.

작아지는 일은 인간인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작아지는 일이 오히려 우리의 자아를 부풀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나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이 일에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내가 그 일에 경성해야 함을 명심하고 또 명심한다.

신앙의 길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삼천포’들을 극복하고, 푸코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내가 바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