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봉사를 요구할 때 접근하는 방식이 대체로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식인데, 이는 봉사를 믿음과 연결하여, 봉사하는 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봉사하지 않는 자는 제대로 된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함으로써 성도의 내면적 죄책감과 열등감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은 겉으로는 헌신을 끌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봉사를 은혜의 기쁨이 아닌 심리적 압박과 체면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성도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 위한 봉사’를 하게 된다.
두 번째는 자아를 부추기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자매님은 목소리가 참 좋아요. 성가대를 하면 참 잘할 것 같아요”, “집사님은 사교적이고 활달해서 새가족부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와 같은 식이다. 이런 접근은 봉사를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무대’로 만들 위험이 있다. 처음에는 칭찬과 격려로 들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봉사의 동기가 하나님이 아니라 ‘칭찬받고 싶은 욕망’으로 변질할 수 있다. 결국 봉사는 자기 확증의 수단이 된다.
세 번째는 기복신앙을 토대로 봉사를 요구하는 방식이다. “봉사하면 남편이 하는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된다”고 하거나, “하늘에 가서 개털 모자 쓰고 짜장면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큰 상급을 받는다”는 식의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은 봉사를 복을 얻기 위한 거래나 투자로 변질시킨다. 이때 봉사는 조건부 신앙의 표현이 되고, 결국 봉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받을 복’이 자리 잡게 된다.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철저히 왜곡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는 비교적 부정적인 접근 방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봉사가 그런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은 훨씬 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봉사한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어서, 또 어떤 이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고 싶어서 봉사한다. 또 어떤 이는 교회의 필요를 보고 자발적으로 섬김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이유로 봉사하라고 명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기쁨조’가 되기를 원하셔서 봉사를 명하신 것일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는 그 은혜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봉사를 명하신 것일까? 교회 봉사란 단순히 빈자리를 메워서 조직이 원활히 돌아가게 하기 위한 ‘운영 시스템’의 일부에 불과한 것일까? 이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봉사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든다. 우리는 왜 교회에서 봉사해야 하는가?
에베소서 4장 12절은 우리가 왜 봉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구절은 봉사의 목적을 다른 어떤 동기나 명분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이유조차도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결국에는 그들의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선포한다.
즉, 성도의 봉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주님의 도구이며, 심지어 사역자들 또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봉사는 교회론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교회론이 바로 설 때만 봉사가 바르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 교회론이 부재할 때, 사역자는 성도를 온전하게 할 목표를 잃고, 성도는 봉사의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채, 인정, 성취, 보상 등 다른 동기들 속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는 과연 교회론이 있는가? 이는 조직신학 교과서에 나오는 교회의 표지나 교회의 본질에 대한 얕은 지식 몇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교회론 즉,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가지고 그것이 교회의 구조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많은 교회가 교회론을 말하지만, 정작 교회론이 교회 운영과 사역의 원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역자들은 교회론을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거나, 성도의 봉사를 조직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론이 부재한 교회에서는 봉사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공짜 노동’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참된 교회론은 봉사를 사역자의 밥그릇을 위한 수단이 아닌, 주님의 몸을 세우는 사명으로 회복시킨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론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깊은 교회론을 Lesslie Newbigin이 씨앗을 뿌리고, Darrell Guder, Craig Van Gelder, Alan Roxburgh, George Hunsberger가 구체화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고 생각한다. 세속화의 심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확산, 개인주의와 자율성의 강화, 제도 종교의 신뢰 약화와 권위 붕괴, 포스트모더니즘과 거대서사의 해체, 디지털화(Digitalization)와 초연결 사회의 형성, (기후 위기와 인권 문제 등과 같은) 새로운 사회적 의제의 부상이라는 현대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크리슨덤(Christendom)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교회의 참된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를 여전히 ‘예배당 안에서 모이는 공동체’로 규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보다 ‘교회의 확장’을 우선시하며, 성직자 중심으로만 교회를 운영하고, 교회 밖의 직장·사회·문화 영역은 ‘세속적 공간’으로 분리하며, 보수 정치 세력과 동맹을 맺고, 복음을 사적으로만 소비하게 하는 교회론으로는 시대의 도전을 버틸 수 없다. 교회는 더 이상 안으로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밖에 나가서 신뢰를 얻어야 하고, 교회의 성경적 본질이 ‘보냄받음’(Sentness)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며, 사역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선교적 존재’로 세우고, 현대 사회의 필요와 의제에 공감하며 그것에 참여하고 관계 맺는 공동체로 재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가 회복할 선교적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선교적 교회란,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고 새롭게 하시는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스스로의 확장이나 생존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이미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신 그 자리에 보냄받은 증언 공동체로 존재한다.
(2) 따라서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를 하는 것’(교회 주체)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하나님 주체)이다. 교회는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는 종교 기관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표지이며,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현재 속에 미리 보여주는 미리보기(foretaste)이다.
(3) 선교적 교회는 예배와 선교, 말씀과 삶, 신앙과 사회가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는 곧 세상 속으로 나아가 그분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파송의 행위이며, 성도의 일상은 예배당의 연장이자 복음의 무대가 된다.
(4) 결국,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행하시는 일을 함께 분별하고, 그 일에 참여하기 위해 보냄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판이며, 복음을 말로 전하는 기관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에게 선교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선교적 리더십이란, 선교적 교회를 가능하게 하는 리더십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선교에 교회를 참여시키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교회를 보냄받은 공동체로 재형성하는 리더십이다. 이 리더십은 교회를 ‘운영하는’ 기술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하나님 나라에 맞게 전환시키는 신학적 리더십이다. 따라서 선교적 리더십은 조직적 효율보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세상 가운데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는지 분별하는 것과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다. 목회자들은 이 리더십을 발휘하여 교회의 방향을 관리에서 참여로 바꾸어야 한다. 지역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해석하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것에 맞게 준비시켜 보냄받은 존재로 세워야 한다. 그래서 교회당 아래에서 조직 유지를 위해 행하는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선교적 성도가 되게 해야 한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교회의 회복이 없이는 봉사의 회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봉사와 교회론은 분리될 수 없다. 봉사가 왜곡될 때 그 원인은 언제나 교회론의 붕괴에서 시작되며, 교회론이 바로 설 때 비로소 봉사가 제자도의 한 부분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우리는 성도들의 헌신 부족을 탓하기 전에, 그 헌신이 뿌리내릴 수 있는 ‘교회적 토양’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참여하는 보냄받은 공동체로 다시 서기 시작할 때, 봉사는 더 이상 죄책감이나 인정욕구나 보상심리에 의해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루고 계신 일에 동참하는 기쁨과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봉사는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을 더 많은 자리로 세우는 조직적 확장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동참하는 선교적 존재로 서는 변혁이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4장 12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봉사이며, 주님께서 그의 교회에 바라시는 참된 헌신이다. 이런 봉사가 교회에 충만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