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도 세상의 가치관을 강요한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세상의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최근 몇 년간 건빵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건빵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다니는 길에서 나누어주는 전도용 건빵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늘날 교회들은 枯死(고사)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고사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사고 자체가 고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고사하게 된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 본연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오직 교회의 생존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이 제시하는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3-35)
이 기사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가치관이 분명하게 대조되어 있다. 세상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가 대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꼴찌인가가 대수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오늘날 교회들이 지향하는 것이 첫째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꼴찌가 되는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꼴찌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가 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이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없다.
가치관, 다시 말해 세계관의 상실은 복음의 사망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복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곳이 되어 세상의 하부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힘을 추구하고 폭력적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는 곳이 되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대관식의 의미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들먹거리며 쌍욕을 뱉어내는 전광훈과 같은 부류의 목사들을 따라 폭력적인 집단이 형성될 수 있고, 암암리에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와 “꼴찌”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를 살펴보면 위 말씀의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protos)는 줄의 맨 앞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시작과 기원을 뜻한다. 프로토스를 점한다는 것은 권력과 명예를 가진다는 의미이며, 규칙을 정하고 성공을 정의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특권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의미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추구하던 것이었고, 정확하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황당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처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면서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함은 물론 하나님의 역할까지 재 정의하고 있다.
꼴찌를 의미하는 ‘에스카토스’(eschatos)는 그 반대를 의미한다. 꼴찌는 단순히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넘어, 공간적으로는 가장 멀리 떨어진 극한의 장소를 의미하고, 시간상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 마지막 때를 의미하고 , 물질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이 중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꼴찌를 멸시하고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조차 상종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지만 정작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비극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노숙자 선생님들이나 가장 극한 가난에 처한 이들을 살피며 다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꼴찌의 자리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꼴찌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처럼 고통당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는 사람들이다. 안타깝지만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이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없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꼴찌의 자리다. 세상의 끝, 가장 밑바닥으로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곳, 단순히 무력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 가장 치욕스럽고, 무엇보다 무엇을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최후의 자리요 순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자리, 예수님이 가셨던 세상의 밑바닥을 향해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 푸코의 말을 항상 기억한다.
“예수님께서 가장 밑바닥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푸코의 이 고백으로 꼴찌가 된다는 것, 꼴찌의 자리로 내려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그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고백인가.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한 걸음씩 용기를 내어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종말론을 뜻하는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는 바로 이 꼴찌라는 단어 에스카토스에서 유래한다. 다시 말해 종말은 꼴찌의 자리에 임한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그래서 푸코뿐만 아니라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은 꼴찌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꼴찌의 자리가 은혜의 자리임을 발견했다. 끝자리인 꼴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13b)
이제 이 고백에 담긴 의미가 보이는가. 이 고백에서 바울 사도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느끼고 있는 안도감과 행복을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가.
이 꼴찌와 첫째의 역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 그는 세상의 제자일 따름이다.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다면 그는 세상의 제자일 따름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늘 거지 나사로의 기사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말을 들려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눅 16:25)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설로 점철된다. 특히 첫째와 꼴찌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가치관)의 알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