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성령을 받으면 ‘봄’이 열립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니고데모는 신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3가지를 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 둘째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하심, 셋째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님의 표적임을 보았습니다 요3:2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셨습니다 요3:3 즉 니고데모 가 신실한 종교인으로 많은 것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현상을 잘 보았지만, 그 현상의 뿌리가 되는 본질계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유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요3:6 육과 영은 차이가 아니라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육으로 아무리 훌륭해도 영적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개미가 아무리 훌륭하고 많은 노력을 해도 사람의 세계를 알 수는 없습니다.
영적세계 (본질계)는 힘으로나 능으로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만나고 알고 보이는 것입니다 슥4:6
성령 받으면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인격이나 능력이 발전되거나 강화 된 것이 아닙니다. 개미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사람이 되지 않는 것처럼.
성령 받으면 평면의 현상계를 살던 사람이 무한 입체의 본질계를 보게 됩니다. 현상계의 삶은 전부가 re-act 입니다. 상황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 전체가 더 좋은 조건과 상황을 만드는 것에 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신앙인 종교는 무병장수 만사형통이 그 내용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아 현상의 평면이 무한 입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이면, 현상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하여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는 불가능 할 뿐 아니라, 그것은 아주 반윤리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자식을 죽이는 반인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밖히신 것은 현상적으로는 비겁한 현실도피 입니다.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처절하게 절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가 죽는 현상을 넘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는 현상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 평면 깊이와 높이에 임하고 있는 본질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현상으로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으로 품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 받으면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평면적 현상에 하나님의 입체적 섭리가 임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사의 핵심은 인격 변화인데, 이것은 인격의 계발이나 발전이 아닙니다.
인격의 전환 즉 거듭남 입니다. 현상계의 re-act의 중심은 ego (거짓자아)인데, 본질계의 누림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 (나의 나됨 고전15:10)입니다
성령 받으면 거짓 자아로 살던 에고가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림 (창1:26-28)의 참 자아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생존을 넘어서 생명 누림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품으며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비의 생명 연합에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