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똑같은 상황을 완전히 반대로 보는 것의 폐해를 지금 목격하고 있다. 작금의 우리의 정치 상황이다. 똑같은 것을 놓고 그것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반대다. 민주당은 이재명 정권을 윤석열 정부가 와해시킨 대한민국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국힘당은 이재명 정권이 빠르게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국민들 역시 즉각적으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느 한 쪽에 동조하게 된다. 정치가들은 물론 국민들 역시 둘로 갈라진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달라진 이러한 현상을 보고 그것을 문제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협의 가능성은 없다. 누가 정권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계속 될 것이다.

최근에는 국힘당 대표의 영화 관람을 이유로 설왕설래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보느냐가 이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의 폭력이었다는 주장이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그와 반대의 관점, 즉 공산당을 색출하는 정당한 과정이었다는 주장이 다시 대두된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역사적 해석의 관점이 다른 것이다.

명확한 사실과 아직도 실제로 살아있는 수많은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다른 관점들은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확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두뇌 속에는 이처럼 이원적 사고라는 점멸 스위치를 가진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이원론적 사고 자체가 인류에게는 물론 개인들에게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든 둘로 나뉜 해석 가운데 하나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것은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실제로 발생한 것이 사실, 혹은 진리를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 자체가 그렇게 이원론적인 사고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 반대되며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태들 사이에서 단순히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이며 이 한계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지닌 한계를 보지 못하며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무언가 절대적인 것을 갈망한다. 실제로 인간 역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맥베스의 이 독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 자체로 투쟁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기 어려운 이유 역시 동일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인간의 이원론적인 사고는 인간을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 수밖에 없고, 결국은 인간을 힘을 추구하는 존재로 만들어 서로 싸우게 만든다. 누가 더 큰 힘을 지니느냐, 누가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즉 더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진 자의 견해가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능력주의로 만든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비 능력”을 강조한다. 비 능력이란 무능력과 달리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비 능력은 단순히 능력주의를 극복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인간 비극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비 능력으로서 그것은 사랑이 지니는 위대한 힘이다. 사랑은 경쟁하지 않고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인간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의 상태에서 구원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 사고실험을 통해 도출한 자연 상태의 인간 존재의 상황이다.

복음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진짜로 좋은 소식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구원의 방식으로서의 비 능력에 대해 문외한이거나 오히려 비 능력을 이원론적인 사고를 통해 힘을 가지지 못한 자의 자기변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사고인 이원론적 사고가 초래하는 인류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오히려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42-45)

이 말씀에는 비 능력에 대한 예수님의 확신이 제시되어 있다. 위대해질 수 있는 사람, 으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마구 내리누르거나 세도를 부리는 자리를 거부하고 오히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능력주의를 거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써의 비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문 정도가 아니라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상당수가 극우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극우를 택하지 않더라도 힘으로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원론적 사고를 지닌 존재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극복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복음을 읽어도 그 복음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인 비 능력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소경들이 된 것이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22-25)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비 능력”의 실천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하나님 백성이 되어, 거리낌으로 다가오고 어리석게 보이는 사랑 속으로 투신하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위해 헌신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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