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위해 살 수 있을까?

만일 이 질문에 'No’라고 대답한다면 그가 누구이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면 ‘Yes'라고 대답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일까? 나는 그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헷갈릴 것이다. 'No’도 아니고 ‘Yes'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맞다.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No’라는 대답도 ‘Yes'라는 질문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No’라는 것을 알면서도 ‘Yes'라고 대답한 것처럼 사는 사람이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거기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하도 많이 인용해서 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시 데리다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그가 말한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다.”가 바로 지금 내가 말하는 내용이다.

애초에 복음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서로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겠거든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고 묵상해보라.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 확률이 1/4로 줄어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혼자서 하는 사랑의 천 배, 만 배는 어렵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교회에서 모두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확률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용기를 내어 그 사랑에 도전할 때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가 계시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다. 초기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성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 부부는 불가능성에 도전할 때 일어나는 실패로서 매우 당연한 것이다.

바나바와 같은 성공한 경우에도 그의 삶 전체가 성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소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가의 선교 여행 참여를 놓고 둘은 다투다 결별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바나바만의 잘못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죄로 죽어야 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그들 부부가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미루어 생각해볼 때 바울과 바나바는 결별한 이후 자신들의 실패를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성령의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으로써 실패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에서 말하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착한 일이라는 것이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자함, 즉 사랑이다) 그런데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백성은 모름지기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애초에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겸손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럼에도 도전해서 실패하겠지만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함을 아는 것이 바로 이 겸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태도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자기 자신을 비운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어지는 겸손이야말로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일도 위선이나 착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0-13)

겸손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죄가 그것을 도울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공의’와 ‘인자’를 실천할 수 없는 존재다. 위 비유에서 보듯이 바리새파 사람은 자신의 성공으로 인해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실패로 인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성공과 실패의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힘과 역량을 강화하는 길을 따른다. 그것이 바리새파 사람이 빠졌던 올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성공하고 커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기도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겸손이란 예수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비움에서조차 교만해지는 존재다. 가난해진 것으로 작아진 것으로 무력해진 것으로 자랑하려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런 교만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가당착이다. 그런데도 나는 늘 그 올무에 빠지고 만다.

주기적으로 주님은 내게 이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신다. 나는 이것이 사망의 몸을 지닌 내 한계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보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행하게 해주는 은혜라는 사실도 안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감히, 말도 안 되는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일에 텀벙텀벙 뛰어든다. 어줍잖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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