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죽음에 관하여 살펴 보자

성경적으로 죽음은 현상이다. 즉 실재가 아니다.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현상 이전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꽃이 피면 아름다움을 본다. 그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꽃의 생명(본질적 실재)이 현상화 된 것이다

죽음은 현상 상태의 변화이지 본질적 변화가 아니다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공로는 물질보다 의식의 선재를 증명한 것이다. 그 유명한 더블슬릿 실험에 의하면 의식(관찰) 할 때에 물질화가 일어난다. 관찰 전까지는 가능성의 수프(단절된 개체가 없는 서로 얽힌 확률성의 세계)로 있던 본질에서 개체화(알갱이)가 생겨, 현상화 된다

성경적 세계관과 일치 한다. 아무 현상도 없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식)이 운행 역사 하시면서 좋았더라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를 펼쳐 내셨다 창1:1-2. 태초에 말씀(하나님의 의식)이 계셨고 이 의식으로 만물은 현상화 되었다 요1:1-3

생명은 영원한 본질이지만 죽음은 그 본질을 다양하게 피우고 또 초월 시키는 현상의 한 단계(a stage)이다. 꽃이 씨앗 싹 화초 꽃 열매의 단계를 지나 죽음이라는 단계를 맞이하면 다시 가능성의 수프로 돌아가 새로운 현상체로 나타나게 된다

이래서 윤회설이 생겨난 것 같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웃긴다. 윤회설은 현상적 진리로, 모든 현상은 소멸의 단계를 거쳐 가능성의 수프로 돌아가 새로운 현상을 조합시킨다. 질량 불변의 법칙,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그러나 윤회설을 인격에 적용시키면, 존재의 본질인 생명과 존재의 현상인 물질을 동일화 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현상이 아니라 인격이 영원히 순환된다면, 인격의 책임감, 즉 가치와 의미가 없어진다. 영원토록 다시 살 수 있으니 이번 생애에 꼭 가치있게 살지 않아도 언젠가 그렇게 살면 된다. 

한 생애를 살기 때문에 내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절대적 의미와 가치를 갖게되며, 나의 선택이 영원성을 갖게 된다. 윤회설을 인격에 적용시키면 삶의 선택과 책임성이 절대성을 잃고 상대화 되고 만다. 생명의 가치를 폐하고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가 되고 만다

성경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 된다. 성경은 인격이 하나님 형상으로 절대적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생애의 선택과 가치를 따라 영원히 나뉘기 때문에 삶의 순간들은 숭고한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적당히 살고 다음 생에에 잘 살지는 우주적 사기극이다. 이번 생애에 적당히 산 그 인격이 다음 생애에서 저절로 새로워 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은 가치를 책임있게 가꿈으로만 새로워 지는 것이다.

사탄의 거짓의 핵심은 선악과로 너 중심으로 선악을 정하여 네 마음대로 살아라이다. 인격의 가치와 책임감을 내 욕심 밑으로 슬쩍 눌러 놓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그 양심을 없앨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정확하게는 죽음 후의 나뉨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사탄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죽지 않으면 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이 말은 절반이 거짓말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영원하다. 그러나 그 생명을 현현시키는 기제인 혈육은 영원하지 않다. 

사탄은 현상(물질과 혈육)을 영구화 시켜 물질과 혈육을 절대화 시킨 것이다. 생명의 초월은 십자가로만 오는데 죽음을 부인하였으니 삶은 현상 지키기에 올인되고 초월은 소멸되어, 평생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남보다 더 낫게가 되고 말았다

이래서 하나님께서는 현상의 영구화를 막으셨다.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3:24 마약 중독자를 그대로 영생 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독을 치유하여 영생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창조는 개체화로 단절 시키는 것이며, 그 목적은 자원함으로 하나됨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의 근원은 하나됨이며 (이순신 장군의 가치는 그 자신과 민족을 하나로 여긴 것) 역설적이지만 그 하나됨을 피우기위해 단절을 절대화시켜 개체를 우상화 시키는 사탄의 거짓을 허용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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