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된 이후 나는 다른 교회에 가서 하는 설교나 집회에서 돈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그것은 모든 교회가 공교회로서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관습이라는 오랜 전통이 교회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방은 미리 돈을 준비했고,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막무가내로 내게 그것을 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쓸데없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돈을 받지 않은 경우가 더 적었지만 최소한 나의 의도를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었고,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는 전에 내게 주었던 돈만큼의 물건을 준비해갔다. 전 교인이 먹을 수 있는 떡을 준비한다거나 그 교회에 꼭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내가 직접 음식을 준비해가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그것이 더 좋았다. 음식에는 사랑이 담긴다. 생각해보니 가장 많았던 경우는 그 교회 헌금함에 봉투를 바꿔 넣은 경우였던 것 같다.

오늘 아침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 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정도의 재산을 유지하려 했으나 평균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게 되어 그것에 대해 반성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강의를 하는 곳에서 제시한 강의료의 삼분의 일만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훌륭한 분이다. 그리고 그 분 뒤에는 김장하라는 또 다른 훌륭한 분이 있다. 문형배 판사의 그런 실천을 가능하게 한 분으로서 문형배 판사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실천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그런 실천이다. 판사라는 고위직을 가진 사람이 국민의 평균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기로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다. 또 강의료를 과다하게 많이 받지 않으려는 노력 역시 동일한 경우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실천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헌법재판소 판사라는 높은 직위를 가졌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다. 나는 이러한 일을 인습적 지혜라고 생각한다.

내가 인습적 지혜를 따르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이유는 인습적 지혜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습적 지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인습적 지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급진적인(radical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한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b)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나는 ‘하나님의 경제’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경제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씀대로 이것을 실천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지혜들을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교 TV를 보지 않게 된 이유도 그곳에 나오는 모든 설교들이 인습적 지혜에도 못 미치는 성서 이해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실천하는 곳은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민들레 국수집’ 외에는 본 적이 없다. 어느 교회에서건 급진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곳을 본 적이 없다.

교회들이 경쟁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내 교회 네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교회들이 경쟁을 할 수 있는가? 교인들 간에 내 것과 네 것이 있다는 사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JMS나 통일교나 신천지와 같은 곳이 그리스도교의 간판을 달고 존재할 수 있는가? …

끝도 없이 들 수 있는 이런 질문들이 가능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음은 물론 복음대로 살지 않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 이해와 목표는 인습적 지혜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를 문형배 전 판사가 확인해준다. 하나는 교회의 복음 실천이 인습적 지혜가 되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교회 역시 큰 자들이 되어야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제도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무력함에 있다는 글을 썼다. 세상 사람들의 진면목은 권력이 주어졌을 때 드러난다. 문형배 전 판사의 진면목은 그렇게 드러난 셈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은 무력하기에 드러나도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목하시는 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 25:37-40)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그야말로 엄위한 자리에서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생각을 해보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그들이 행한 일들이 그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을 위대한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반응했을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무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품격대로 반응했을 따름이다.

만일 의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인습적 지혜를 실천한 것이었다면 그들은 문형배 전 판사와 같이 세상의 주목과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또 그들이 문형배 전 판사와 같이 성공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들이 무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임금께서 아신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상 사람들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큰 일이 아니어서, 그 일을 한 사람이 큰 자가 아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런 일들을 더 하지 못하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그들이 처한 위기로부터 근본적으로 구원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

나는 내 의식이 미치는 한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살고자 애를 쓴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인습적 지혜를 목적으로 삼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모름지기 따라야 할 것이 인습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실천하지 못한 우리 마음의 동기까지도 그분은 헤아리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내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무력함에서 드러나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공과 실패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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