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믿는 직원들 예수 영접하라"

기사를 읽다 눈에 들어온 내용이다. 극우로 알려진 넥스트클럽이라는 곳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이 기사화되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개신교를 견인하는 것은 4영리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지의 표명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4영리와 같은 전도방식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한 부분을 내어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의 복음을 아는 것은 물론 그 복음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삶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여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됨은 물론 반사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4영리식의 예수 영접은 아주 잠깐 심각해지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눈물 한 방울만 찔끔 흘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리고 곧바로 구원받았다는 선언이 주어진다.

나는 오래 전 내 친척 한 분의 장례식에서 친척들이 고인께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돌아가셨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목사인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흔쾌히 잘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구원이 그따위로 값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일종의 초대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다. 구원은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내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의아해 한다. 그리고 너 같은 것이 어떻게 거대한 그리스도교 전체를 깡그리 부인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내가 부인하는 것은 거대한 개신교 전체가 아니라 잘못된 구원 이해다.

4영리가 정말 복음적인가?

나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그렇게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복음은 치열한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일종의 천지개벽과 같고, 환골탈퇴와 같다.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이고,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는 그것을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면서 새 사람이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4영리와 같은 사변적인 복음이해나 교리들이다.

믿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넥스트클럽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전형적인 행태다. 그들이 극우일 수 있는 것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믿고 있지만 예수를 영접했다면 극우가 될 수 없다. 예수를 아무리 몰라도 예수가 하신 행동이나 전하신 복음은 좌파를 넘어 완전한 공산주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가 보고 통찰을 얻었던 하나님 나라다. 마르크스는 초기교회를 원시 공산사회로 보았고, 거기서 공산주의의 통찰을 얻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을 완전히 단념해야 하는 비폭력 평화의 나라다.

오늘 아침 나는 박진영의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이번 정부로부터 장관 대우를 받는 자리를 제안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고사했다고 했다. 자신은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사고에서 진보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고, 보수는 부자들의 편이었다. 그래서 진보의 정책을 따르면 부자들이 우리나라를 떠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사고는 그가 명백한 보수임을 보여준다. 보수라기보다는 부자의 편이라는 이해가 더 적절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산당을 드나들었던 모습은 영원히 인간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간음”이라는 단어로 묘사했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았다. 나는 박진영의 사고가 이스라엘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4영리는 복음을 우회하는 에움길이다. 그것은 복음대로 살지 않을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 복음대로 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한다. 장례를 치르면 “천국환송잔치”를 연다. 이것이 구원파의 사고임과 동시에 구원파를 만들어낸 복음이해다. 그런 사람들은 극우도 가능하고, 진보도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야 말로 극우도 아니고 좌파도 아닌 말 그대로 급진적인 나라다.

그들의 말대로 예수를 영접했다면 그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고 난 이후 나는 이런 그리스도교와 복음 이해를 그냥 넘길 수가 없다. 그들은 넥스트클럽 같은 집단을 극우로 지적하고 그들이 청소년들을 극우화하는 것을 지적하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지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라고 말씀하시고, 그런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대 전제이자 원칙은 ‘자발적인 동의’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극우인 넥스트클럽과 같은 이들을 내버려두신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그것을 깨닫게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올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발적 동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하나님 나라를 보여줌으로써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하나님 나라로 다가오도록 만드는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 당연히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는 없다.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는 그렇게 자발적 동의로 이루어지는 지난한 나라다. 하지만 그런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샬롬’이 이루어진다.

‘샬롬’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령의 보호하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인 ‘샬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다.

넥스트클럽을 지적한 사람들(이들 역시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다)이 보여주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샬롬’이다. 그들을 지적하지 말고 자신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샬롬’을 보여줄 때 그들 역시 스스로 다가와 하나님 백성이 되고 싶다는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급진적인 복음의 진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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