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대화 중 믿음이 다른 경우는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인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러지 않는다. 믿음은 다른 것이다. 믿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믿음은 과정이고 그리스도인은 과정적인 존재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같을 수가 있는가. 어제는 같았던 사람도 오늘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어떤 이들은 중요한 골자만 같으면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경우에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그런 생각을 해도 현실에서는 만남이 불가능하다. 내가 아무리 어떤 경우에도 만남을 이어가려고 해도 상대방이 나를 피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런 일이 아주 자연스럽다. 접근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말을 다한 후에는 내게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차단을 해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나도 그 사람의 이름까지 잊어버리게 된다. 물론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그 사람이 남아있기는 하다. 그렇게라도 나는 만남의 기회를 간직한다.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이단들을 정죄하고, 그들과의 교류를 금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이후 그리스도교는 다른 믿음을 구별하고 색출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믿음을 가져도 되는 사람은 가톨릭의 경우는 교황만이 남았고, 개신교의 경우는 담임목사들만이 그런 권한과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고는 공고하다.
그러면 교황과 담임목사들만이 성인이고 나머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幼兒들인가. 그렇다.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유아는 부모(교황이나 담임목사 혹은 교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슬픈 상황인가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감지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라야 하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하다가는 모든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치도곤을 당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을 치리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치리가 아니라 유아를 버리는 것이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하지 않는 일을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이유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랑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단순히 그리스도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다. 그런데 사랑이 실종된 그리스도교에서 유아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빛이 될 수 없고,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하부구조로 전락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렇게 된 그리스도교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경쟁과 차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믿음 때문에 만날 수 없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자체가 이렇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는 가톨릭 신자를 만나면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형제로 생각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는 개신교 신자들을 집 나간 자식 정도로 인정만 해주어도 감지덕지다. 같은 종파 내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랑이 실종된 결과라는 생각을 사람들은 더 이상 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충격적이었지만 공감이 갔다.
“한국 그립지 않아, 지옥이었다.”
그는 한국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가 꼽은 한국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쟁’이었다. 임윤찬은 “한국은 좁고 인구가 많아서 경쟁이 치열하다. 모두가 앞서기 위해 안달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가 17세쯤 (피아노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을 때 질투와 불필요한 압력이 터져 나왔다. 정치인과 사업가들조차 얽혀들었고, 그것이 저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고 털어놨다.
경쟁의 세상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제로 섬 게임’이 벌어지는 정글로 만든다. 힘 센 자가 힘없는 자를 먹어치운다. 정글에서는 이것이 질서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그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사회가 된 것이다. 임윤찬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최근 캄보디아 범죄 집단에 잡혀 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납치가 되어 갇힌 경우도 있지만 제 발로 그곳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해 죽음에 이르거나 범죄의 수단이 되었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곳으로 산 채로 각막을 축출해 팔아먹는 정말 무서운 범죄의 소굴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그곳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갔을까. 그것은 경쟁에 진 젊은이들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지옥이 된 한국에서 벗어난 그들이 더 지독한 지옥을 만난 것으로 그것을 지옥의 확장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쟁을 질서로 이해하는 세상의 본 모습이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복음이 세상을 경쟁하지 않는 곳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경쟁이 없는 나라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종이 되는 세상이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음은 물론 궁극적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가장 경쟁이 심한 곳이 되었다. 세습이 이루어지고, 학력과 능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판단의 근거로 작동하는 곳이 되었다. 무엇보다 교회들 간의 경쟁이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치열한 곳이 되었다. 개교회는 담임목사의 城이 되었고, 교인들은 교회를 자기 나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한국의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한국 사회를 지옥으로 만드는 선봉장이 되었다. 스스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만을 교회의 열매내지는 자랑으로 여기는 곳이 되어 지옥과 천국을 가리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교회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는 곳이 아니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사람대접을 받는 곳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 演技를 할 수 있게 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을 낳고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구원타령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서 이웃이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복음의 알짬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사랑이 실종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짠 맛을 잃으면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천국과 지옥은 사후세계가 아니고, 멀리 있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