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용불량자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드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맞다.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시대의 ‘루저’의 상징이자 피해야 할 이 시대의 낙인이다.
하지만 내 신앙의 여정에서 내가 신용불량자가 된 것만큼 내게 큰 유익이 된 사건은 없다. 건강이나 관계의 해체와 같은 다른 환난이 아닌 것 또한 내게는 큰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작아지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겪어야 할 환난 가운데 신용불량자라는 경제적인 몰락은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신용불량자라는 이 시대의 낙인이 찍힘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nothing이 되었다.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nothing이 됨으로써 복음에 눈이 뜨였다.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이 내게도 전해진 것이다.
온갖 호사를 누리며 떵떵거리며 살았다면 나는 세련된 신앙으로 간증을 하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의 대세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과거의 나는 이미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십일조를 오십만 원을 하면서 엑셀을 타고 다니던 나를 보고 사람들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해주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게 진정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하자도 모르는 복음의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나를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탄을 하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것은 내 영광이었다. 그대로 그 길을 갔다면 나는 장로가 되어 교회의 중심으로써 오늘날 사람들이 바라는 멋진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나를 알던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잘못되어 망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들의 사고에서 신앙의 성공은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입으로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다는 찬송을 부르면서도 오직 세상과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서의 온갖 호사를 누리기 위해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친다. 돈 놓고 돈 먹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눈을 뜨면 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성서의 표현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 내 눈에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세계적인 현상으로 고착된 불평등 심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사다리차에 묶여 오르내리던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은 노동자들이 보이고, 길거리의 노숙자들과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바뀐 것이다. 고개를 숙이면 보이는 것들이 언제나 위만을 바라보는 동안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한사코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절대적인 이해를 가진 곳이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계급이 생긴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 혹은 목사 장로와 평신도, 그리고 교황청과 교단과 같은 것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권세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인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존재가 너무도 확고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만큼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거대한 권세가 되었다. nothing이 되어야 그것이 보이는데 nothing이 된 사람은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자신을 노출시켜 권세의 일원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게 될 뿐이다.
그런 권세가 된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불평등이나 오늘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희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희년이란 불의이며 무질서이며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다.
오늘날 이 모든 불평등과 가난의 원인은 부자들의 불로소득 탓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적 활동을 통해 창조한 가치의 대부분을 이자. 배당, 임대료, 자본이득 등의 명목으로 탈취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정당한 주식투자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의한 일이냐고 반문했다. 은행에 저금을 하고 이자를 받는 것은 정당하고 주식에 투자해서 배당을 받는 것은 왜 불로소득이라고 하느냐는 반문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자야말로 돈의 마력이며 악마의 수단임을 안다.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과정에서 돈이 어떻게 사람을 윽죄이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거의 날마다 죽음에의 유혹을 이겨야 했다. 너무도 억울했고, 너무도 무력한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신용불량자라는 우리 시대의 nothing이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지니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한 곳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세상 중심에 돈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불로소득이라는 자본의 특권이자 불의의 원천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런 불로소득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실체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불로소득은 현대적 개념으로 확장된 ‘지대’라고 할 수 있다. 희년의 나팔소리는 인간들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지대’를 무효화시키는 하나님의 개입이다.
희년은 그야말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통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희년이라는 말을 더 이상 구체적인 현실과 관련하여 다루지 않는다. 답답한 예수님은 희년의 여러 조항들을 더 간단하게 줄여 강조하셨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내 것이 없다. 내 것이 없으니 네 것도 없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제 것이라 주장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시다.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를, 다시 말해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온 율법을 하나로 묶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경제방식으로써 희년의 완성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열리는 단초가 바로 이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불로소득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은 바로 이 돈의 총화인 불로소득을 무력화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대안이다.
복음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혁명적인 주장인지를 깨닫는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