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 충만을 구한다. 그런데 과연 성령이 충만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령 충만한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연상한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에게 기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기적이 과연 성령 충만의 본질일까.

성령 충만에는 목적이 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백성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것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샬롬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교회의 모습이다. 성령은 하나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이 모습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결과물이다. 성령에 충만해진 사람들은 공동체가 되었다. 다시 말해 성령 충만은 개인적이기보다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체를 상실한 그리스도교에서는 완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이끄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이방인들의 나라인 교회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기도원 운동을 통해 그와 같은 현상은 두드러졌다. 지금도 당시와 같은 열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뇌리에는 기도원 운동의 잘못된 성령 이해가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경험한 기적을 성령 체험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성령 이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그들의 정체가 결국에는 모두 드러났기 때문이다. 과거 유명했던 성령 운동가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 과연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그 반대로 지금도 그런 사람들의 영향력이 남아 그리스도교를 밀교로 만들고 성령 충만한 사람을 큰무당과 같은 샤머니즘의 능력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잘 생각해보라.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성령 충만은 무의미하다. 나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고, 각종 은사들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은사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은사들이 개인의 성령 충만의 징표로 인식되어 교회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바울 사도는 이런 말을 해야 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은사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방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성령 충만에 목적이 있다는 말과 같다.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 말과 함께 여러 지체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의 몸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대해 언급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 몸의 비유야말로 가장 적확한 교회에 관한 비유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을 보라. 오늘날 교회들을 바라보며 그 교회들이 하나라는 생각은 불가능해졌다. 각각의 교회는 폐쇄된 하나의 성(城)으로서 서로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교회의 종탑은 마치 깃발과 같이 자신들의 영역임을 주장하는 표지가 되었다. 그런 교회들이 말하는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주장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신들의 교회야말로 구원의 방주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감히 말하지만 구원의 방주 따위는 없다. 자신들의 교회에 타야(다녀야) 안전하다는 착각은 마귀가 불어넣은 사탕발림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면 분열이 없음은 물론 다른 약한 교회를 향한 걱정이 앞서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자신보다 적은 교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큰 교회 목사들은 잰 척을 하고 작은 교회 목사들은 열등감에 젖어 고진감래를 꿈꾼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정의를 모르는 ‘가인의 성’들이 되었다. 그 본질이 맘몬의 신전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할 따름이다.

성령이 태어나게 하신 교회는 카리스마적 구조를 지닌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카리스마라는 말을 권위나 기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카리스마적 교회는 은사들에 따라 구성된 교회를 일컫는다. 교회는 위계질서나 민주주의가 아닌 성령의 은사들에 따라 구성된다. 은사들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든든히 세우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에서 사명을 담당하게 하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영적 은사들은 교회를 드러내는 표지이자 각 지체들의 삶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성령 공동체가 되어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그 모습을 다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아! 이 수많은 가인의 성들을 어찌할꼬!

이 마음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주님의 마음이 아닐까.

하지만 그래서 나는 성령 충만을 구한다. 주님이 주실 은사로 어떻게 이 돈밖에 모르는 암울한 세상과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를 날마다 상고하고 묵상한다. 이런 내 생각이 이미 성령 충만의 증거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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