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의 1945년 항복 선언에는 ‘항복’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패배’나 ‘종전’이라는 단어조차도 사용되지 않았다. 더 이상 피해 받거나 괴멸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평화’를 선택했다는 말을 했다. 천황만 그런 사고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본인의 항복 체험은 오히려 자신들의 피해 체험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 민족의 징용과 위안부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이해가 된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한다.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지원한 것이며, 징용의 경우 역시 동일한 주장을 한다. 자신들이 박해하고 죽인 일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여러 다른 나라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바꾸는 일에 집요하게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런 돈의 수혜자들은 일본인들의 그런 노력에 마침내 감화되었고, 그들의 식민사관에 자신들의 이해를 더해 공공연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일본인들에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은 우리나라가 힘을 길러 일본을 식민지로 삼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본인들의 사과는 불가능하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자신들이 당한 고통과 그 이후의 피폐해진 삶을 보상받을 일은 없다. 그것을 기대하면 할수록 자신의 처지만 곤고해질 따름이다.

“나는 생존자다”라는 다큐를 보았다. 익히 알고 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재조명한 내용이다. 보는 내내 억장이 무너졌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그곳에 입소했던 사람들의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했다. 그들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곳에서 나온 이후에도 한 번 부서진 그들의 인간성은 회복될 수 없었다. 그들의 몸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 역시 피폐해졌고,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했다.

반면에 형제복지원 원장의 가족들은 잘 살고 있었다. 그곳의 2인자가 목사라는 사실은 더욱 시린 내용이다. 그렇게 인간들을 죽이고 말살하는 일의 선봉에 목사가 있었다. 그들은 그런 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그곳의 원장이 법에 심판을 받고, 요양원에서 죽은 이후에도 그들은 호주로 가서 그곳에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고급차와 큰 주택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다. 피해자가 그들을 찾았을 때 사과하는 이는 없었다. 자신은 그 일과 무관하며 할 말이 있으면 법으로 하라는 말을 했다.

어떻게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유린했으면서도 자신은 그 일과 상관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자신들의 재산이 그들을 그렇게 유린했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나 개인적으로도 동일한 일을 겪었다. 나는 선의로 내 재산과 이름을 우리 교회 집사였던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이름이 대표이사로 되어 있던 법인이 망함으로써 결국 나는 모든 재산을 잃고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내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투자를 했던 곳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가족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위협도 받았다.

그런데 그 집사와 그의 가족들은 다시 잘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다. 나는 그 집사가 내 명예를 회복해주길 바라서 지금도 여전히 신용불량자인 상태로 살고 있다. 그것은 내 명예의 회복만이 아니라 그 집사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 생각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주곤 했지만 나는 그 집사와 그의 가족들도 구원 받기를 원해서 그동안 파산신청을 해주겠다는 여러 사람들의 제안을 거절해왔다. 금전적인 배성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이제 나는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난을 통해 알게 된 복음과 만나게 된 하나님으로 나는 만족한다. 이것은 ‘신포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모든 것을 다 팔아 보화가 묻혀있는 밭을 사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에서 나를 인도하신 성령님의 손길을 이제 나는 똑똑히 볼 수 있다.

광복절을 맞아 생각해본 일본과 다큐에서 본 형제복지원 원장과 2인자였던 목사, 그리고 잘 살고 있는 그의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자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인간에 대해 생각했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떠 오른 단어가 ‘양심’이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 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딤전 1:19)

양심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양심을 버린다.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아니 인류의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정상인 곳이 되었다. 다른 누구를 예로 들 필요가 없다. 미국의 대통령인 트럼프를 보라. 얼마 전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윤석열 부부를 보라. 이들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심 없는 인간이다.

히로히토 천황, 일본인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형제복지원 목사 임영순, 그리고 그의 가족들, 그리고 우리 교회 집사였던 부부와 그의 가족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양심의 부재다.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삶을 따라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존재유무를 떠올렸다. 원장과 그의 가족들이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거지 나사로의 기사에 등장하는 부자를 생각했다. 특히 그가 지옥에 간 이유를 더 충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눅 16:25)

부자가 지옥에 가게 된 이유는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온갖 호사를 다 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은 부자처럼 온갖 호사를 다 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부자가 온갖 호사를 다 누린 것이 지옥행의 이유임을 밝히고 있는가. 그것은 부자가 나사로를 외면하고 온갖 호사를 다 누렸다는 사실에서 그의 양심의 부재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내가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마다 감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내 양심의 소리였다. 그것은 인생을 누리며 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달리 맛있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조차 없는 이들을 생각하라는 성령의 속삭임이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벧전 3:21b)

내게 다시 세례를 주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반드시 이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시간과 일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인간 양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 유무를 결정한다. 스스로를 속이는 인간은 김건희만이 아니라 양심이 부재한 모든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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