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끝나간다. 어디가 아프거나 특별히 절망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년 수가 팔십이고, 길어야 백 년이다. 마지막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자꾸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기사를 보면 참 대단한 분들이 많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무언가는 해냈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며칠 전에는 과거에 직장생활을 같이 하던 몇 사람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삼십 년 전의 내 사진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나는 비교된다. 과거에 나는 그들보다 잘 살았고,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졌고, 내가 가진 능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인생이 정말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내 인생은 정말 ‘폭망’ 아니면 ‘꽝’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내 업적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 내 인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키고,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내게 우리 교회의 교세를 물었다. 내겐 세상의 관점으로는 인정을 받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설명할수록 나는 구차한 사람이 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정말 망친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예수님이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내 인생은 망친 것이다. 내 인생의 의미는 오로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예수님에게 달려 있다. 성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명징하게 선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내 인생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독불장군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다만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오랜만에 최근 연락을 해온 과거 우리 교회의 교인을 통해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 지금은 꽤 큰 규모의 교회를 다니고 있는 그는 자신의 허전함을 달래주거나 채워줄 목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에게 그런 위로를 주지 못했다. 그는 내게 예의를 갖추어 목사님 하시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로 그것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 분은 그분만이 아니다.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했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말씀이 더 실감난다.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위에서 말하는 “여러분”일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폄훼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게 그럴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내 눈에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5-8)
결국 나와 그 사람들을 가르는 것은 ‘영’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은 ‘영’을 따르고 있다고 믿는 그들이 육신을 따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듣는 이들에게 얼마나 괘씸하게 들리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화를 내며 돌아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돌아서는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항상 내게 있다. 나를 잘 알면 알수록 그 이유는 구체적인 것이 된다. 그들의 지적은 사실이다. 나는 문제가 많고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중요한 단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성령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에 속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 그들은 육신에 매여 있다. 육신에 매여 있는 사람의 생각은 결국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믿는 이유도 다 나 잘 살자는(행복해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내 생각은 지독한 아전인수처럼 보인다. 나만 옳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숙명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가난이 축복이고, 어떻게 자신이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구할 수 있는가. 그 이유를,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의 유무에 달렸다고 선언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성령을 따를수록 나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신랄하게 나를 비난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것 되심을 상상할 수 없다. 내가 누리고 있는 생명과 평화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나는 내가 며칠 전 만난 내 직장 동료들을 통해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강남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적지 않은 연금을 받으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며 산다. 그런 그들의 눈에 가난뱅이 신용불량자인 내가 얼마나 불쌍해 보이겠는가. 잘못된 선택으로 있는 복을 차버린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나이를 내세워 내게 반말을 한다. 그 사실이 불쾌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그들이 나를 판단하고 있는 그들의 내면을 보는 것이다.
정말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내 인생. 그러나 나는 그런 내 인생이 허무하지도, 후회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나를 이끌어 오늘의 나를 만드신 주님의 노고와 손길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사무칠 뿐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리고 송구하고 또 송구하다. 내 결함으로 영을 따른다는 사실을 가린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쉽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도 지울 수 있다.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더 부끄러울 따름이다.
역설적으로 나는 옛 직장동료들을 만나고 힘을 얻었다. 그것은 내가 육신을 따르는 것의 끝을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를 이끄시는 영이 나를 어디로 어떻게 이끄시던 그것이 생명과 평화임을 믿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으로 내 인생은 망했다. 하지만 나는 영을 따른다. 내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이제 하나님만이 내게 남은 오직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의 이 외로움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