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신교 교회 관련 기사에는 미담 기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목사들의 이야기가 희망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희망을 의심한다. 희망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희망은 참된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미담 사례들은 주로 섬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 42-45)
섬김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으로써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섬김이란 크고자 하는 사람, 다시 말해 크고자 할 수 있는 사람이 실천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크고자 할 수 있는가. 어렵지 않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크고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섬김이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섬김의 정의다.
여기서 나는 다시 엘륄이 말한 “비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끄 엘륄은 능력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거나 내리누르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용하는 것을 “비능력”이라 명명했다. 엘륄은 이러한 “비능력”을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라고 주장했고, 나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서 세상의 능력주의와 정확하게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세상과 정 반대인 하나님 나라는 엘륄이 말하는 “비능력”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비능력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셔야 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 어려웠던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예수님에게 그랬듯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큰 유혹이다.
헨리 나우엔 신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유혹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과 능력을 사용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엘륄의 비능력과 일치하는 복음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바로 이 일에서 계속해서 실패했다. 그리고 그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최고 사제가 되어 그리스도교 안에 심어놓은 악의 씨앗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의 군대와 풍부한 재정으로 그리스도교를 호도했고,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되었다.
복음의 알짬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한 복판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본질 가운데 가장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목사들의 미담 사례는 이 본질을 가린다. 그리스도교의 회복은 복음의 알짬인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집중되어야 한다. 미담 사례들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그 일이라는 주장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인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사이비다. 사이비란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를 의미한다. 아마도 미담 사례의 본인들조차도 자신들이 사이비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섬김의 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미담으로 포장되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품어야 한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 6:1-4)
“비능력”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음에 있다. 비능력을 행하고 그것을 남에게 보이려 할 때 그것은 위선이 되기 때문이다. 세이비어교회의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이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면서도 방송에 출연하지도 않았고, 가사화되는 것도 막았고, 상을 받지도 않았고, 밖으로 나가 강연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그분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들이 그들의 일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만들었다.
이제 내가 왜 미담 기사들이 희망이 될 수 없고, 희망으로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담 기사들의 주인공들이 마지막 한 걸음을 잘 디딤으로써 그분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
의로운 일들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사실을 알려 더 많은 일을 하거나 더 많이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피하신 것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비능력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 자랑거리가 되지 않을 때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들의 존재가 세상의 희망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담은 개인의 영광(위선)이 되어 세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