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제원 전 의원이 죽었다.

충격적이다. 여러 생각들이 오간다. 사람들의 생각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황망하다. 사필귀정일까.

가장 먼저 나사로의 기사에 등장하는 부자가 생각난다. 부자는 행복했다. 기사의 내용으로 유추하건데 천수를 누린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잘 살았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다. 그는 지옥으로 갔다. 성서는 그의 지옥행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가장 먼저 그는 “얘야”로 불리고 있다. 부자는 얼마나 큰 자였겠는가. 아마도 세상에서 그는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후 그의 호칭은 “얘”다 “얘”란 어른이 아이를 부르거나 같은 또래끼리 서로 부르는 말이다. 이 기사에서는 아브라함이 한 말이지만 아브라함은 여기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 어쨌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얘”이며 하늘에서는 서로를 그렇게 불러야 한다.

세상이 세상인 것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큰 자로 여기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생각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도토리다. 아무리 커도 도토리가 커질 수 있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그만그만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는 얼마나 큰 자들이 많은가. 작금의 탄핵정국은 그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윤 석열을 보라. 그의 아내님을 보라. 그들은 법을 능멸하고도 끄떡없다. 오히려 법이 알아서 긴다. 서슬이 퍼런 검사님들이 그분을 조사하기 위해 출장을 나가 핸드폰을 반납하고 조사가 아니라 해명자료를 듣고 오지 않았는가. 엄위한 현실을 뚫고 석방이 되지 않으셨는가. 국민의 거의 절반을 거리로 끌어낼 수 있지 않은가. 크다. 정말 크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모두가 “얘”일 뿐이다. 새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의 기사를 보면 인간은 하늘 나라나 지옥에서나 모두가 어린이가 된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은 크지 않다. 세상에서 큰 자는 어린이와 같이 되지 못함으로써 지옥행이 확정된다. 세상에서 알아서 어린이가 되는 일이 이토록 엄중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스스로 어린이처럼 되어 어린이 취급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어린이가 아니라 사람 수에 들지도 못하던 작은 자를 의미한다. 그것은 곧 세상의 무시와 천대를 의미한다. 이 일은 인간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신용불량자가 된 나는 곳곳에서 그런 시선을 받았고, 그것은 참기 어려운 혹독한 고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도 수시로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고통을 견디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수틀리면 나를 찬다.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커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꺼이 작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라. 오늘도 나는 온누리교회에 다니는 연예인들이라는 짧은 영상을 보았다. 이 하늬도 있었고, 김 보겸도 있었다. 그밖에도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렇게 커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들은 커지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그것은 다만 지옥행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다.

장재원은 사는 동안 온갖 호사를 다 누렸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큰 자가 되어 다가오는 수치를 견딜 수 없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세상의 관점으로는 짧고 굵게 살다간 그를 부러워하는 그리스도인이 없기를 바란다.

여기서 잠깐 나사로를 생각해보자.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 먹고 살았다. 그의 경쟁자는 사람이 아니고 개였다. 그래서 개가 동료의식의 표현으로 그의 헌데를 핥았다. 나사로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애초에 커질 수가 없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는 하늘 나라에서 위로를 받는다.

장 제원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십 년 동안을 앓았다. 그는 고통 속에서 참다, 참다 마침내 고발을 했다. 그렇다면 장 제원이 죽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로소 마음의 위안을 받았을까. 돈을 받지 못해 억울할까. 어떤 것이든 그의 기분 역시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용서를 말하면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불가능한(무조건적인) 용서에 대해 강조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원수를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나아가 사랑하려 할 때 그리스도인은 해방의 기쁨을 맛본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비상식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길만이 인간이 해방과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을 명하시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묵상해보라.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라. 그것이 자신을 옭매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복음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마라. 세상은 그런 것들이야말로 절대적임을 주장한다. 힐링이니 소확행이니 버킷리스트와 같은 말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변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소중한 기회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라면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은 천천이요 만만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 아니 구원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작아져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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