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가 둘로 갈라졌다. 탄핵을 찬성하는 전광훈과 손현보,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한 쪽과 탄핵을 찬성하는 쪽으로 갈라졌다.

나는 당연히 탄핵을 찬성하는 쪽 정도가 아니라 하루 속히 윤석열은 물론 입만 열면 어깃장을 놓고 있는 국힘의 국회의원들도 싹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나는 양비론자의 혐의를 지닌 독불장군이 된다. 그리고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신세가 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지만 대한민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 혹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권은 물론 정부의 형태도 없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는 권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도덕적 선택 정도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게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현실적인 나라로서 내 모든 삶을 결정하는 통치권을 가진다. 하나님 나라는 내게 미래형 혹은 사후에 현실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속한 실체로서의 나라다.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나는 예수님의 이 기사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 절묘한 질문을 던졌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 사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자들과 세금 바치기를 거부하는 자들(시카리파)이 그 두 부류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문의 한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에는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거나 바치지 않는 두 가지 방식만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세계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그들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현실세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현실세계보다 더 중요한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를 그들에게 소환하신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이다.

분명 세상의 문제인 세금의 문제에는 두 가지 방식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금의 문제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의무를 강조하신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그것은 비록 바리새파 사람들이 로마에 협력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것이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탄핵정국 역시 세금문제처럼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처럼 탄핵정국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탄핵정국에 대한 태도 자체를 유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탄핵 찬성이라는 분명한 세상에 대한 입장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실체인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탄핵이라는 현실세계를 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문제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세상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항상 이런 하나님 나라를 일깨우는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실체가 없는 미래의 세상이거나 사후의 세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을 양비론으로 읽고, 나를 잘난 척 하는 독불장군으로 치부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돈을 주인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시던 예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성으로서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모든 삶을 견인하던 성전은 더 이상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곳이 되었고, 돈의 노예가 된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교 역시 예루살렘처럼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일깨워도 그들은 그것이 양비론처럼 들리는 세상의 하부구조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처럼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그곳에서 폭력적이고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건 밝히지 않건 강도들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은 세련된 강도들이 더 큰 문제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강도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를 둘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는 양비론자로 보게 된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새찬송가 515장을 찾아 불러보라. 그리고 선한 일꾼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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