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방패'가 된 신학을 해체하라

'불평등의 방패'가 된 신학을 해체하라

오늘 읽은 기사의 제목이다. 읽는 순간 내게 다가왔다. 늘 생각하던 것이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처럼 여겨졌다.

그동안 나는 신학을 폄훼하는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학은 교리의 근거로서 복음을 대신한다. 하지만 복음과 달리 신학에는 작은 자들에 대한 절대성이 부족하다. 다만 곁다리 정도로 취급할 따름이다. 그것은 신학자가 되어 신학을 논하는 순간 그 사람이 누구든 자신의 이론에 절대성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자도 자신의 신학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없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신학자들과 신학에 대한 실존이다.

나는 그동안 신학교 교수들의 책들을 읽어왔고, 설교 역시 들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권위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자유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해석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있는 권위가 있었다. 학위가 그러했고, 교수라는 직위가 그러했다. 그들이 펴낸 책들 역시 그들에게 권위를 더해주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내의 큰 자로 행세하면서 특히 대형교회 주변을 어슬렁댄다.

나는 그들의 학문을 폄훼할 의도가 전혀 없다. 지금도 나는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려 한다. 하지만 점차로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없어지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 23:2-4)

나는 이 말씀이 신학자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조차도 나는 따라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다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옳았다. 하지만 오늘날 신학자들의 경우는 그들과 달리 다 행하고 지키라는 말씀조차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신학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달라진 신학을 논하기 전에 이 말씀에서 우리가 살펴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자리는 회당의 상석이고,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대변한다. 유대교에서는 그런 권위가 존중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는 그 어떤 권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사실을 인식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누구도 권위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권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워드 요더라는 메노나이트 신학자가 있다. 그는 <예수의 정치학>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은 매우 급진적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공동체가 있다. 그는 한 마디로 공동체의 대가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 이론에 따라 공동체를 설립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어떤 선택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정적 자신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이론이 공동체 식구들의 교과서가 되곤 했지만 그는 언제나 공동체에서 열외였다. 한 마디로 그는 권위 있는 존재로서 항상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였다. 결국 그는 그가 속한 공동체 와해의 원인이 되었다. 더구나 그는 대학에서 자신이 가진 권위로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저질렀고,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한 모든 말과 그의 모든 책과 신학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말을 할 때도 나는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려 한 것이다. 내가 그의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 그처럼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넘어진 이유가 그가 모세의 자리에 앉게 되었기 때문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성공하는 것이고, 많이 아는 것이고, 많은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불식간에 자아를 부풀게 한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돈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김건희의 경우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유니클로와 같은 실용적인 옷을 입던 김건희가 영부인이 된 후 보석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성공한 그의 자아가 부풀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의 경우는 현저하게 그렇게 될 위험성이 커진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위선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겸손한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신을 보지 못한다. 성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 17:9)

한 마디로 겸손한 신학자는 존재할 수 없다. 누구라고 신학자가 되면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신학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고 범주화하는 사람이 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위의 인용한 말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학자라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모세의 자리”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신학교 교수들이 예배에 참석하면 담임목사가 그들에게 축도를 부탁하곤 했다. 그들이 담임목사보다 어린 경우에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신학교 교수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한 신학교 교수가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여 사례비를 받지 않고, 집회나 설교를 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내용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교수를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행동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바로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신학 자체의 변질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 최고의 사제가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황제가 주도하는 여러 번의 공의회를 통해 신학은 복음에서 벗어나 “황제의 신학”이 되었다. 그 정초를 놓은 것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다. 그가 놓았던 신학의 정초는 근본적으로 성서의 신학이 아니라 “황제의 신학”이었다. 사탄은 권위를 추구하는 그를 통해 신학 자체를 변질시켰다. 그것이 바로 신학이 ‘불평등의 방패’가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다. 복음과 신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형성된 신학을 바탕으로 교리중심의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사랑 이외에는 될 수 없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더 이상 누구도 실천하지 않으려 하는 말씀인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라.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사랑은 “모세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는 사람, 다시 말해 작은 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황제의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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