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성경적 삶의 원리는 경자유전이다. 농토는 농사짓는 이의 것이다. 농지가 자본화 되는 것과 소작 제도를 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인간 소유의 대상이 아니며 사용하는 자가 누리도록 베푸신 은혜이다.
이 원리의 능력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예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다. 한국은 1949 제헌헌법을 제정할 때에 이 원리를 채택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국유화 시킨 토지들과 미 군정에 귀속된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토지개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지주들의 반대와 정치 부패로 토지개혁을 하지 못하였다. 한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군관민이 함께 저항 하였으나 베트남은 착취의 시달린 소작민들이 낮에는 양민 밤에는 베트콩으로 저항하여 엄청난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패망 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기는 한국도 1987년 전두환 정권이 개정 헌법 121조를 통과시켜 임대와 위탁 경영을 허가함으로 실질적 농지 투기를 가능하게 했고, 1990년 노태우 정권이 주말 영농 체험 영농 등의 명목으로 자격증만 취득하면 도시 거주자가 농지를 소유 할 수 있게 하였다
결과는 신문로는 정주영 땅, 서소문은 이병철 땅, 남대문은 김우중 땅, 독도는 우리 땅이 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에 5.6% 인구가 전국대지의 62.5%를 소유하고, 전국 산지의 85%를 서울사람이 소유했으며, 전 농민의 64.7% 가 소작농이 되었다. 산업화를 감안하면 조선후기 보다 더 악한 상황이다.
주제가 엉뚱한 대로 빠진 것 같지만 성경은 결코 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림 안에 삶의 건강한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에 나누었다
구약에서 이 경자유전의 원리를 파괴하고 이스라엘을 국제화 자본화 시킨 것이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무역상으로 지중해를 통해 스페인까지와 에시온 게벨 항구를 열어 인도양까지 무역을 하였고, 그의 부의 중심은 무기 중개업이었다 (왕상10:28, 29)
그는 자본화를 위하여 ‘12지파 가족제도‘를 폐하고, 성전을 건축하여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고, 12관장 제도를 세워 (왕상4:7-19) 12지파를 교묘하게 파괴 하였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그것을 ‘정보‘로 전락시켜 요압 아브넬 아마사 시므이 아도니야 아비아달 등 정적 숙청에 이용하였다. 정보화의 총화인 AI 시대란 그 본질이 모든 지혜 (삶을 복되게 가꾸는 것)를 정보화 (이기고 차지하는 것)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가 40년 동안 이룬 번영은 400년 (분열 왕국 330년 포로 70년) 동안 계속 무너져 내리며 멸망하였다. 그가 다윗과 함께한 제사장 아비아달을 제거하여 아나돗 (감람산)으로 추방하여 선지 물결이 출발 되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섬겨야 하는데 추방 되었으므로 백성들 가운데서 말씀을 증거하는 ‘광야의 소리‘가 된 것이다
330년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 아나돗에서 예레미야를 불러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다 렘1:1-8:17 하나님 심판의 이유는 유다가 솔로몬 체제의 정보 권력 부 중심의 나라가 되어,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신 ‘은혜 정의 공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은혜 (헤세드)는 긍휼로써 가족의 본성이다. 모든 사람이 악인이라고 해도, 그 어머니는 그는 선한데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의 (미스팟)는 윤리적 의미가 아니라 resources를 함께 나누어 쓰는 가족됨이다. 단절을 부정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함께의 중심이다.
공의 (쩨다카)는 법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치유를 이루는 마음을 말한다. 성경적으로는 십일조를 통해 나누어지는 구제와 공평으로 유다 전체를 한가족으로 보는 마음이다
이 3가지를 우리 영혼에서 피어나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유다의 더불어 살기 (not 종교개혁)를 회복하려 한 3왕이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이다. 여호사밧은 전국에 교사를 파송하여 말씀을 가르쳤으며, 히스기야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내각을 이사야에게 보내어 그의 말씀만을 따르게 하며, 요시야는 멸망한 북왕국 지역까지 교사를 보내어 말씀을 가르치고 개천절 축제인 유월절을 회복하였다
십자가를 만나 ‘은혜 정의 공의‘가 피어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됨의 참 복으로 하나됨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