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 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31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 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위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의 말씀 증거의 핵심으로 ‘음부에 버리지 않는다’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가 반복 된다
먼저 음부에 버리지 않는다는 뜻을 보자. 음부는 구약에서는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로 나오는 죽음의 세계이다. 모든 사람은 죽으며, 죽으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죽음의 세계는 아브라함 안과 아브라함 밖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아브라함 안의 세계를 성경은 ‘아브라함의 품‘ 이라 한다
‘품‘이라는 단어는 칼파스로 bosom 또는 a bay of the sea로 험하고 지친 항해를 마치고 안전한 항구에 평안히 정박함을 뜻한다. 힘든 생애를 마치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식을 얻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실 때의 낙원이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밖의 세계를 바사나스라 하며, 성경에서는 지옥 고통을 표현하는 대표적 단어이다. 이 칼파스와 바사나스 사이에는 깊은 구렁텅이 있어 두세계는 완전히 단절 되어있다.
메가스 하스마로 불리는 이 구렁텅이는 물론 시공적인 것이 아니다, 현상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즉 아브라함의 품과 밖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 또는 다른 존재의 차원이다.
이 존재 차원의 다름을 신약성경은 썩는 세계와 썩지 않는 세계로 표현한다. 베드로 증거의 중심이 “주의 거룩한 자 (성도)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신다“는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 되었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공동체의 구원의 핵심으로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의 첫 복음 증거에서도 나타난다. 행13: 34 35 37 세번 주의 거룩한 자 (성도)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고 선포한다
썩음과 썩지 아니함은 같은 차원의 다른 모습이 아니라 본질적 다름 즉 차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 한다” 고전 15:50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다, 사망의 권세가 깨어졌기 때문에 15:53, 54. 썩음은 유한이고 썩지 않음은 무한이다. 유한을 아무리 더하여도 무한이 되지 않는 것처럼, 현상적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 차원의 다름이다.
‘썩지 않는다‘는 말은 구원의 신약적 표현의 핵심이다
성경적 인생론의 핵심은 허무이다. 종신토록 땀흘려 수고하여도 거두는 것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요 다시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창3:17-19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2 허무에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 노릇 롬8:20, 21 향방 없는 달음질 허공을 치는 주먹질 고전9:26 결론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1:3 이다. 즉 인생은 허무하다이다. 이것이 유한한 현상 차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 차원의 결국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썩음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썩음을 당치 않는 차원을 여신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의 총 결론이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이다
이 썩는 현상 차원에 썩지 않는 본질 차원이 열린 것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것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위선을 다 하는 것으로 산상수훈의 중심에서 규명 하셨다 마6:1-18) 선악과적 좋고 나쁨과 이익 손해 밖에 없는 평면의 세계에, 심지어 고난과 희생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입체적 세계가 열린 것이다. 혈육의 세계에 영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천박한 계산의 종 노릇에서 자유하여,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어 그 섭리를 죽음에까지 품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쉴새없는 현상적 계산으로 결국 허무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섭리로 품어 사랑의 합력선을 거두는 하나님의 세계가 내 혈육의 삶에 드디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