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창세기 1장에는 좋았더라 (토우브)가 7번 나와 완전하게 선한 (good)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 준다. 이 토우브가 2장에서 18절에 다시 나오는데, 18절 전에 4번 형용사적 용법으로 나오며 선언적 용법으로 다시 나오는 것은 18절이다
이 여덟 번째 선언은 부정적으로 “로우 토우브 not good” 이다. 무엇을 좋지 않다 (배드) 선언하느냐 하면, 히브리어 배드는 악 (evil)의 개념으로 단절, 분열, 부분적 즉 whole이 아님을 뜻한다
하나님께 악은 단절이며 선은 하나됨이다
그래서 성경의 회복 (구원)은 단절의 회복 즉 하나됨이며, 이 것이 신약으로 엡 2장은 하나됨의 길은 십자가 뿐임을 보여준다
신약은 출발에서 구원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자 이심이라” 마1:21 라고 선언 한다. 어떻게 구원 하시는가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23 이다. 창세기 3장에서 단절 되었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라고 더 강력하게 선포 한다. 거하시매 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키나우로 장막을치다 즉 영주하다의 뜻이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이것을 3장 14절에서 선명하게 선포 한다
이에 12 제자를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하게 하시며
제자 (함께함을 야다 한자)를 세우시고 세상에 그 함께함을 전파 하시고자 한 것은, 인류가 함께함을 알고(야다) 살고 나누게 하심이다. 종교 단체를 조직하고 건물을 짓고 교리를 세우고 법을 만들어 교세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인류의 문제는 단 한가지 함께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은 세계에 유일한 동양 3국이다. 재능있고 근면한 착한 백성들이다. 동양 3국이 서로 돕고 축복하며 살아 왔다면, 3나라와 그들의 삶의 길은 지금 온 세계와 역사를 축복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로 수천 년을 싸우며 살아왔다. 이유는 단 하나 옆에 있기 때문이다. 남녀도 연애할 때는 좋지만 부부되어 함께 살면 갈등이 시작 된다. 이유는 단 하나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절된 인간의 저주다. 터무니 없는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단절의 죄책감과 불안으로 하나님 형상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생존으로 전락시켜 삶을 헛된 힘겨루기의 경쟁과 대립으로 낭비 해버린다
단절의 삶은 깊이를 상실한 평면 뿐이어서, 삶의 실제 (무한 차원의 신비)를 가꾸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껍질 (나뭇잎 치마)만 만든다 마6:1.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합력하여 이루어지는 선을 가꾸지 못하고, 당장의 평면적 계산 뿐인 얕은 삶을 살아 종신토록 땀흘려 수고하고도 가시덤불과 엉겅퀴 만을 거둔다
하나님 계시 (성경)의 중심은 ‘함께함의 회복‘이며, 현상에서의 함께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하는 곳이 임재의 함께함 (교회)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함을 앎이 열리면, 현상이 끝나고 본질이 완성 될 때에 우주적 하나됨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하나됨이 다스림이다. 남편이 아내와 하나되어 주면 아내는 죽음의 길에도 기꺼이 남편과 함께 한다. 하나님의 하나됨을 사는 자는 현상계가 끝나고 온 우주에 천국이 임할 때에, 만물과 하나되어 줌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유업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