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창세기 1, 2장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주를 창조 하셨는가 하는 물리적 생물학적 설명이 아니다. 어떻게 라는 명제는 지극히 근대적 개념으로 성경이 계시되던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진화론과 싸우는 창조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 주겠다는, 우상숭배적 어리석음이다
창세기 1, 2장은 인간론이다. 온세계 역사를 향해서 인간의 본 모습과 참 가치를 선포함으로, 우리의 인간답지 못함에서 진정한 사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그 진정한 사람의 모델과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것이다)
첫 번째 창조 기사 (1:1-2:3)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본성인 긍휼 (호6:6 마9:13 12:7)로 하나님의 모양 (3위1체)를 이룬다. 3위1체는 3분의 다른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완전히 하나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3분의 하나님이 하나를 이루시는 것은 서로의 아픔을 온전히 품으시는 긍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긍휼로 품어 하나됨을 다스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만물을 판단 정죄 없이 그냥 그대로 (as is) 품어 용납하며, 그 때에 만물은 그 자체가 될 수 있어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함이 없이 자기를 피운다. 이 사랑의 품음을 받을 때, 만물은 기꺼이 자기 자신을 그 사랑에 내어 드리며, 이것이 성경적 다스림이다
첫 번째 창조 기사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추상적 계시인데, 두 번째 창조 기사에서는 이 계시의 실제적 모습을 보여 준다
너를 나보다 더 귀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품어 둘이 한 몸이 될 때에 만물을 나와 하나로 품어 피어나게 하는 생명의 다스림 (부모의 자녀 사랑) 으로,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섭리대로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존재로 세운다 (수치는 3장의 마귀의 거짓으로 들어 온다)
창세기 1, 2장이 사람의 blueprint이며 3장 부터는 이 사람을 피워내는 하나님의 섭리가 출발된다
섭리의 출발은 단절의 허용이다. 마귀는 자신이 사람을 속여 하나님의 유업의 섭리를 폐하고, 사람을 통해 자기의 다스림을 온 우주에 펼치는 것에 성공했다고 착각하지만 그 착각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리라” 하는 마귀의 제안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시는 주님의 한마디에 박살나 버렸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기중심 즉 단절이 된 것이 섭리의 출발이다. 자기중심적 단절의 인간은 이제 하나님 같이 자기 맘대로 살기에, 하나님을 피하고 잘못은 서로에게 전가한다.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진정한 사람 됨 (나됨 : 주님의 부활에서 회복 됨 고전 15:10)을 상실하고 나뭇잎 치마 만들기 (본질을 상실하고 껍질 만드는 인생)로 종신토록 땀흘려 수고 하지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거두는 허무의 삶이 되고 말았다
이 단절된 삶의 피할 수 없는 결과가 형제 죽임으로 4장에 나타난다. 단절의 필연적 결과가 피해의식이다. 동생의 제사가 열납되면 ”하나님 다행이에요, 제 제사만 열납 되었더라면 동생이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인데, 단절 된 인간은 거꾸로 보인다
사람과 상황을 그냥 그대로 품어 안지 못하고 자기중심의 선악과로 보는 자는 모든 것을 거짓된 비교의식과 피해의식으로 본다. 그 결과는 실제를 피하고 유리하는 자가 되며, 그 뿌리는 무릇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왜곡된 자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가 나올 것이며, “내가 하나님과 대면 하였으나 내 생명이 보전 되었다” 하는 고백으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것을 우리는 눈치 챌 수가 있다. 조금 멀리 보면 주님을 부인한 시몬이 자신을 만난 통곡으로 베드로가 될 것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