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병 특검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두 특검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또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인 내 눈에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유는 이 사건이 세상이 희생의 체제임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시절 윤석열의 격노로 채상병 사건의 혐의자들이 8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임성근 사단장이다. 그는 장군이다. 사람들은 윤석열의 분노로 수사의 내용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여 수사외압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나는 수사외압이 아니라 윤석열이 분노한 이유에 주목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장군이 졸병 하나 때문에 목이 날아간다면 어떻게 사단장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윤석열의 이 발언에서 우리는 그의 사고를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친분이 그 이유겠으나 그의 주장은 장군과 같은 높은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과 채상병과 같은 졸병들은 죽을 수 있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 그의 사고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희생의 체제”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희생의 체제다. 힘을 가진 자들은 희생양들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얻고, 세상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희생의 체제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누군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래 전 나는 책에서 모든 문명이 희생의 체제라는 내용을 읽었다. 그것은 정확한 통찰이다. 아무리 좋은 문명과 정치 체제와 성군이나 좋은 오늘날 정치가로 대변되는 통치자라고 해도 그들의 사고의 핵심은 희생의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인류 문명의 대부분은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를 들 수 있는데 로마를 유지하는 것은 군대와 승리로부터 얻은 노예들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만의 특별한 방식이 아니라 모든 문명의 기반이었다. 꼭 인신을 구속하는 노예가 아니더라도 생산의 기반을 이루는 농노들이 있어야 했고, 그들은 언제나 수탈의 대상임은 물론 언제라도 희생될 수 있는 소모품들이었다.

현대에 들어 공식적인 노예제도는 물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신매매와 같은 방식의 노예제도는 존재하고 있고, 특히 과거 농노와 같은 노동자들의 존재는 모든 사회를 가장 밑바닥에서 지탱해주고 있는 대표적인 희생양들이다. 채상병 사건에서 분노했던 윤석열이 강력한 노동운동 탄압은 물론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같은 사고에서 나오는 체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2-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분이 정말 메시아이신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위의 내용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듣고 있으면서도 과연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4-6)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가 맞다 아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으로 판단을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에 주목한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치유의 은사”를 성령의 역사로 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치유와 기적을 보라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은 그분으로 인해 그분 주변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다.

이 기사에서 열거되고 있는 눈 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 환자, 듣지 못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은 봉건시대 농노나, 우리 시대의 노동자들과 같이 언제라도 희생될 수 있는 희생양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해방되거나 구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례 요한의 질문을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사는 너무도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들, 그리고 지도자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愚氓이 되어 이 사실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거절하셨던 기적을 좇는 무리들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표적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불신자들이다. 빵을 먹고 배부른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지닌 윤석열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목사들이 너무도 많다. 김장환과 이영훈만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목사들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목사들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과연 제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알아들었을까?

나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예언자로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의 사고에는 여전히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사명을 다했지만 도래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다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사명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거기까지였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대척점에 있는 대안사회다. 지금은 가끔씩 대안사회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말로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희생양이 없는 비폭력 평화의 나라다. 이 사실은 복음의 알짬(중핵)이다. 하지만 이 나라로 들어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그리스도교는 걸림돌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의 세계로 밀어놓았다.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로 밀어놓음으로써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구하지 않는다.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의 “따 놓은 당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진면목이자 자화상이 되었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의 사망을 의미한다.

채상병 구명 의혹으로 특검의 압수수색이 들어오자 이영훈은 신성한 교회를 침범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한 교회가 아니라 무너져야 할 맘몬의 신전이다. 희생의 체제를 적극 옹호하는 맘몬의 신전은 무너져야 한다. 아니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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