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하나님과 사람의 핵심적 차이는 먹음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 먹음은 삶과 존재의 중심인데, 사람은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혀끝 만족 시키고 에너지 확보와 이익 관계 만들기 정도로 생각한다

사람은 맛나고 기름진 것을 배터지게 먹는 것을 잘 먹는다라고 하고, 하나님은 한조각의 빵을 사랑으로 나누어 먹는 ‘일용할 양식의 먹음’을 잘 먹는다 하신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 광물 세계와 달리, 동물의 세계는 공간 사용이 존재의 근간이다. 그리고 인격적 존재인 우리의 공간 사용의 중심은 식탁이다

동물 세계도 같이 먹음이 있지만 그 ‘함께 먹음‘이 생존을 위한 협조를 넘어, 관계와 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인간의 식탁 뿐이다. 함께 먹음 속에 관계의 회복과 소망의 약속이 들어 있는 것은 인간의 함께 먹음 뿐이다

함께 먹음이 없는 집합은 조직일 뿐이다. 기능은 있지만 존재의 양육과 성숙은 없다. 함께 먹음이 없는 관계는 평면적일 뿐 입체적 통합(integration)을 피울 수는 없다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면 꼭 같이 먹는다. 아프리카 원주민 중에는 신랑신부가 같이 자고 아침에 움막 앞에서 같이 먹으면 결혼으로 축하해 준다. 교황과 영국 여왕이 만나도 클라이막스는 만찬 연회이다

이 시대의 위기는 함께 먹음의 상실이다. 열무김치와 꽁보리 밥을 바가지에 비벼서 콧등에 땀 맺으며 옹기종기 함께 먹는 가족의 원천적 연대성을 잃어버렸다

이 연대성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먹음을 사회적 구분과 차별로 만들었다.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왜 먹었느냐가 사회적 위치와 지위가 된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전락 시킨 것이다. 먹을 때 만큼은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그냥 우리‘여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며 사도 공동체의 본질이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identity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이“(마9:11) 셨다. 구분과 차별 없이 함께 먹는 자리가 하나님 앞에 ‘한가족‘ 된 자리, 하나님 안에 ‘하나된‘ 자리 즉 천국이다

나사렛 예수는 ’함께 먹음‘을 회복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이 사랑의 함께 먹음 (애찬 유12)을 주의 만찬이니 성만찬이니 하는 의식으로 만들고, 화체설 등 요란한 교리로 만들어 반대하는 자는 죽이고, 종교적으로 부적절하면 참여 할 수 없는 즉 예수님의 ‘떡과잔‘과는 정반대로 만들어 버렸다

397 카르타고 종교 회의에서는 결국 두 세 가정의 성도들이 모여 함께 나누는 ’떡과잔‘을 금지 시켰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여 세우신 것을 기독교는 다시 종교 의식으로 전락 시켰다

사도 공동체에서는 주님의 날에 주님의 이름으로 임재 앞에 모여 즉 세상의 구분과 차별이 사라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떡과잔) 원천적인 존재의 회복, 관계의 회복, 하늘의 삶을 바라는 소망의 회복을 누렸다. 세상을 초월한 가슴으로 생명 피어나는 함께함이 기독교의 주일 성수로 전락 되었다
 

이 사람이 존재 자체로 존중되고 사랑받는 함께 먹음이 한 세기 만에 로마 제국을 뒤집어 엎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는 이 생명의 빅뱅을 잃어버린 종교의 요란스러움과 소란스러움으로 극성스럽다

이학권 목사 / <하나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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