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종교의 핵심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호 6:3 6 사 1: 2-3 마 9:13 12:7). 성경의 하나님은 숭배 받기를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숭배를 증오 하신다 (사 1: 11-17 66: 3-4)

모든 신들은 숭배 받기를 좋아하고 숭배를 통해 숭배자들에게 복을 준다 (이것으로 그들은 참 신이 아님이 증명 되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I am I am 이 시다. 숭배는 숭배자들이 숭배 대상의 가치를 확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치 확증이 필요하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이 온 우주 영원에서 존재의 담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벨론 포로이다.

당시에는 신이 신으로 존재하기 위하여서는 3대 존재 담보가 있어야 했다 : 신전, 나라, 백성. 지금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신이 없는 이유는 그 3가지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에 여호와와는 자신의 신전, 나라, 백성을 스스로 폐하시고, 자신은 종교 제의로 숭배 받는 신이 아니라 두세 가정들이 말씀으로 삶의 아픔을 품는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현현시키셨다

성경의 하나님은 나를 숭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선과 의로 창조하신 세계를 기쁨으로 누려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복은 그 선과 의를 누리고 열매 맺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슴이 복된 것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신같이 취급하여 숭배하면 복을 주는 줄 안다. 기독교의 핵심 문제가 하나님을 누리지 않고 나의 종교적 의와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아 (take grace not receive) 내려한다, 유산 노리는 못되먹은 자식들처럼

왜 아버지를 누리지 않고 종교 만들어 헛된 고생을 할까? 탕자의 비유 처럼 맘대로 하기 위해서이다. 맘대로 한다는 것은 의무와 아픔은 피하고 편하고 이익되는 것만 취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누리는 중심은 아픔과 책임감이다. 하나님은 섭리의 완성 때까지 이땅의 아픔을 아파하시며 그 책임감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종교는 아픔은 피하고, 책임감은 주님께만 떠넘기고 우리는 편하려 한다

이 우리의 맘대로에는 기가 막힌 거짓이 들어 있다. 그것은 모두 각자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정당화이다. 맘대로에는 객관적 표준이 없으니 모두가 자신이 종교에 가스라이팅 된 것 만큼 최선을 다하니, 종교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선을 다 한다는 말 속에 가장 위험한 영적 늪이 들어 있다. 종교인들은 각기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하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고 또 조금씩 개선해 나가면 언젠가는 충분해 질 것이라고 스스로 속여, 결코 죽지 않으니 거듭나지도 않는다

혈과 육으로 난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포도주가 됨을 거부하고 물로 썩어가고 있을 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요 3:6) 육의 최선이 영이 되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 종교다

오늘 기독교는 돌이킴 (육이 영으로 거듭남, 물이 포도주가 되는 질적 변화) 없이 구원 받았다고 확정해 준다 (가짜 구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으로 태어난 아기를 살아 있다고 확정하는가, 그냥 누리고 양육 할 뿐)

땅을 살면서 (돈과 힘을 숭배) 하늘을 사는 척 하고 하나님도,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도, 그 세계도 모르면서, 의미도 모르고 가치도 없는 종교 활동에 마르다처럼 바쁘고 피곤하다
 

종교적 숭배는 그 목적이 나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니 초월이 일어날 수 없다. 나의 힘과 능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의 섭리를 만나 붙들림 받음으로 창조된 우리의 초월적 본질 (하나님 형상)이 피어나고 열매맺는 것이다

평생 나뭇잎 치마 만드는 종교인들과 아픔으로 하나님과 하나되어 그 소망(그의 나라와 그의 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과 의를 누리는 자녀들, 이 나뉨이 보여야 한다

이학권 목사 / <하나임교회>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