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설교의 제국이요, 설교는 그 중심이다. 놀라운 것은 설교를 듣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 삶은 없고 교리의 오묘한 이해에 빠져서, 설교를 잘하는데를 찾아 파리떼 처럼 몰린다
그러나 설교는 구약에도 신약에도 없으며, 어떤 선지자도 예수님도 사도도 설교한 적이 없다. 설교는 정기적으로 같은 설교자가 같은 수동적 청중에게 연설의 형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선지자 예수님 사도 등 누가 전했던지, 계시가 필요한 삶의 상황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전달자로써 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받은 대로 전하는 진실이지 기술도 실력도 아니다.
설교자는 말씀에 대한 자기 지식을 청중에게 이해시키는 요리사이다. 양념을 치고 데코레이션을하고 멋진 그릇에 서빙을 하여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먹게하는 기술과 능력이 중심이다.
말씀은 가슴으로 하나님의 가슴을 만나는 것이다. 그 삶의 상황에서 백성을 생명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가슴을 만나 왜 그렇게 말씀 하셨는지 그 뜻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을 만나는 것은 교육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면 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적합한 가슴에 하나님의 가슴이 만나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피차 가르치라 (골 3:16) 서로 권면하라 (롬 15:14) 각자의 은사를 따라 하라 (고전 14:26)고 하지, 전문가가 하라고 한 적이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가슴에 전문가가 있겠는가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종교교훈으로 전락 되었다
그러면 성경에도 없고 사도 공동체도 없었던 설교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유대교의 회당 전통과 그리스의 소피스트 전통의 짬뽕이다. 유대교는 회당을 조직화 (미니멈 10가정) 하면서 모임의 중심을 두루마리를 읽고 해석하는 것 (미쉬나 전통)에 두었다.
bc 5세기 그리스는 소피스트 (수사학)가 문화의 꽃이었다. 문화적 수준이 있으면 하루 일과를 마친 후 극장에 모여 소피스트의 연설을 듣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였다. 정치 철학 역사 연설을 하는 저들은 돈을 받으며 잘할 수록 더 큰 도시로 영전 할 수 있었다. 외모 연설 기술 감정호소 능력을 파는 저들은 재치와 유우머는 필수였다. 고정된 장소에서 같은 청중들에게 가운을 입고 하였으며 전용 좌석에 앉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
소피스트들은 오늘날의 연예인으로서 그 인기는 대단하였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 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의 수사학이 로마를 정복했다는 역사가의 멘트는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가 인기 연설에 중독 되었다면, 기독교는 살지 않는 설교 엔터테인먼트에 중독 되어있다.
유대교의 회당 전통과 로마의 소피스트 전통을 잘 버물러 전례의 중심에 설교를 세운 것은, 콘스탄틴이 단일종교로 제국을 단일화 시키는 작업에 기여한 대 그레고리 I세 교황 (5번에서 나눈)이다.
하나님 안에 하나된 생명을 살고 나누는 신앙이, 종교로 전락된 주범이 설교로 그 부작용은 말로 다할 수 없다.
1. 말씀은 하나님의 뜻 전달이 아니라 설교자의 능력과 성공을 위한 것.
2. 회중은 완전히 수동화되어 만인 제사장의 사멸과 담임 목사의 교황화.
3. 신앙은 생명 살고 피우기가 아니라 종교 지식 배우고 이해하는 논리의 경쟁.
4. 무엇보다도 성화없는 종교 강화 : 전도는 교인 확보 선교는 기독교세 확장.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