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권 목사 칼럼 [Diagnose, 진단하다]
’죄‘는 교회 (not 기독교 단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죄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아니라, 죄의 실제성, 파괴성, 죄책감, 무기력하게 함에 대하여 선포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화해, 용서, 회복이 진실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금기 (taboo)가 되었고, 하는 자는 반드시 추방된다. 실험해 보면 안다. 어떤 모임에서든지 ”오늘 우리의 죄를 나누어 보십시다“하면 그 모임으로부터 영구 추방된다
이유는 해결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의 ‘죄와 용서의 하나됨‘은 개념적 이해일 뿐 실제가 아니다. 죄는 단절인데, 극복하여 하나된 관계를 사는 것을 기독교 안에서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죄 (단절)를 넘어선 구원 (하나됨)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교회당 얘기들은 can-do-faith (믿음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smile-God-loves (신경쓰지마 하나님이 널 사랑하시니까) I-am-fine-pretense (난 괜찮아 문제없는 척하기) 뿐이다
인간의 문제는 단 한가지 죄로 인한 단절과 소외이다. 가정 학교 직장 심지어 교회까지 켜켜에 쌓인 소외 (alienation)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중압감 (heaviness)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우리의 첫 번째 해결은 마취 (numbness)다. 너무 무겁고, 오래 되었고, 소망은 없는데 그래도 살아가야 하니까 가슴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 부끄러워 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렘 6:15
실제를 직면하지 않고 피하고 유리하는 가인의 삶은 그저 상황이 전부일 뿐,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다 상실 했다. ”경제만 괜찮으면 다 괜찮은거야“ 평면, 껍질, 보이기 밖에 없는 불쌍한 삶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두 번째 해결은 묻음 (buried)이다. 직면 할 수도 없고, 직면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 상처 와 후회만 주니 영혼 깊숙히 묻어 버린 것이다. 그 무덤에서 내뿜는 방사능이 나를 죽이고 너를 죽여 간다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삶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은혜를 베푸시니 문제 될 것 없다고 하니, 더 지치고 힘들고 소외되어 간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 (샬롬 = 구원)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4
한마디로 종교에서는 여전히 죄에 억눌려 ‘참나‘는 허용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 그 좋았더라의 포이에마 (엡 2:10)는 상실되고, 산다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신비인 생명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더더욱이 하나됨이 없는 종교 생활에 점점 더 무기력해 질 뿐이다
종교의 신은 항상 옳고 의롭고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니, 내 삶의 문제는 분명히 내 잘못이다 “ He is all good, so must be my fault” 그는 내 아픔 내 절망 내 지침에는 별 관심이 없고, 항상 옳고 바르기만을 바란다.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되는 종교 생활에 우리는 또 한번 지치고 또 한번 좌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