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기사를 읽었다. 자신이 대통령 인수위원장이었던 시절 자신이 칭찬한 사람을 윤석열이 잘랐다는 내용이다. 윤석열은 안철수가 칭찬을 하자 그 사람이 안철수 편에 섰다고 생각하고 일 잘하는 그 사람을 단 하루 만에 잘랐다는 내용이다. 안철수는 윤석열의 검사생활(권력의 상징으로써)이 윤석열의 사고를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했다. 일리가 있다. 안철수는 정치판에만 뛰어들지 않았다면 꽤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철수를 통해 정치판이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된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하다 그만둔 것을 보고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두었다.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다. 권력에 맛에 중독되지 않고 권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권력으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훌륭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권력의 맛을 보지 못하거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해서 권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은 모두가 권력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모두 권력의 속성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절대 권력을 지닌 왕들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왕위 계승권을 지닌 아들을 필두로 사랑하는 아내와 절대 충성을 약속하는 군 통솔자와 같은 사람들은 물론 지근에서 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왕 자신에게 위험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왕이라는 권력에 위험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권력의 속성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작동한다.
그렇다면 상상을 해보라.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위할 수가 있겠는가. 이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절대 권력을 가진 북한의 김정은을 생각해보라. 그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작금의 탄핵 정국에서 한동훈의 공은 지대하다. 그가 없었다면 탄핵 재판은 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것 역시 배신의 아이콘들이 권력을 지닌 자와 권력을 지향하는 자 사이의 연속된 배신이다. 서로를 믿을 수 없기에 벌어진 인간 비극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얼마나 친밀했었는가. 그러나 그런 친밀함도 권력 앞에서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 신뢰였다. 그 둘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불행을 감수하고라도 그런 권력을 사모한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절대 권력을 사모하지 않아도 된다. 전지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지 않은 인간이 절대 권력을 사모하는 순간 가장 불행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권력을 버려야 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이 말씀은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누가 높으냐는 곧 누가 권력을 가질 것인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권력을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써 섬김이라는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대안을 제시하신 것이다.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은 섬기는 자, 곧 종이 됨으로써 권력의 존재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제자들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는 권력이 없는 나라다.
작금의 탄핵 정국을 전광훈과 손현보 목사가 이끌고 있다. 나는 이들이 특별히 타락한 존재이거나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런 맹활약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엄연히 권력이 존재하는 권세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라. 목사나 성직자들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교회를 통치한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 교인들을 섬긴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섬김은 섬김이 아니라 통치다. 그런 통치지 이루어지는 곳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사람들의 나라이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권세가 되었기 때문에 전광훈과 손현배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할 수 있고, 맹활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 그런 맹활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모든 목사들과 성직자들 역시 다르게 보이지만 마구 내리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이방인 통치자들이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맘몬의 신전이 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으로도 권력을 가지거나 추구하는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권력의 속성을 보고 권력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의 추구를 단념한 사람이다. 때리면 맞아야하고, 속절없이 무시와 천대를 당해야하지만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가장 행복한 결말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권력의 포기는 물론 모든 힘의 단념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비로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 대가를 지불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구원과 해방이라는 보물을 가질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보물을 기쁜 마음으로 산 사람에게 샬롬이라는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물이 주어진다. 샬롬은 결핍이 없는 평화다. 예수님은 그것을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샬롬이야말로 구원과 해방의 상징이다. 바울 사도가 그토록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도 샬롬이라는 말과 같다. 그것은 권력을 포기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이 권력을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권력이 아니라 돈의 형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을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빈이란 인간에게 영적인 특효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은 돈을 포기한(청빈을 실천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인간을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권력이 없는 섬김의 나라다. 무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다. 그곳에서 인간은 비로소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배나 미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곳에는 어떤 배신도 없다. 권력과 배신은 동전의 양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