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반대를 외치는 폭력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교가 망해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때려 부수자는 폭력적인 언사에 습관적으로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친다. 그것이 그들의 “아비투스”다. 그들의 그런 행태는 폭력적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거친 사나움이다. 특히 그런 그들을 선동하는 전광훈 같은 자는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나는 요즘 평화라는 단어를 늘 묵상하게 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복음의 핵심에는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을 평화의 복음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폭력이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가장 분명한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폭력을 어디에서나 목격하고 있다.
교회 안에 폭력이 만연한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파악했다. 폭력은 교회의 통치수단으로 작동한다. 나는 며칠 전 트럼프가 폭력이 무엇인지를 매우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태도는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폭력적인 기제들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것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임과 동시에 영적 성숙의 바로미터가 된다.
나는 지금도 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내 안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 물론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내재된 폭력을 내려놓기 위해 성찰하고 경성한다. 그 일에 있어 가장 좋은 수업은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로마의 군인들이 생각난다.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게 하고 갈대 홀을 들게 하는 것, 홍포를 입혀드린 것, 예수님을 때리며 빈정거리던 것, 침을 뱉던 것 등등이 생각난다. 예수님은 얼마나 참기가 힘드셨을까. 눈에 힘만 주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그들에게 그런 조롱과 빈정거림을 당하시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을까. 하지만 정작 예수님에게 힘든 것은 그런 그들을 향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지켜내셨다.
가끔씩 당하는 일이지만 나도 얼마 전 비슷한 수치를 당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참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새삼 예수님이 나의 본이시라는 생각을 절감했다. 하지만 정작 폭력은 그런 당하는 상태가 아니라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며칠 전 지하철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돈을 드렸던 노숙자를 만났다. 그는 젊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젊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노숙자가 늙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노숙자로서의 능력을 드러낸다. 그는 노숙자로서 비범하다. 그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먼저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내게 돈을 요구한다. 나는 그가 돈을 요구하기 전에 그에게 줄 돈을 준비한다. 그런데 그날은 내게 현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안 보이는 곳으로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안녕하시냐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지나갔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돈을 주면서 그때는 현금이 없었다는 말을 해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어제 같은 장소에 그가 있었다. 내 주머니에는 현금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방향을 바꿔 반대방향으로 나갔다. 그가 내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의 뻔뻔함이 싫다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적으로 그를 피했던 것이다.
내가 그를 정말 주님처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에게서 위선을 보았다. 무엇보다 그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야말로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사실 내 책임만도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지만 그는 내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친밀함을 거절한 것은 그였다. 어쨌든 나는 그 순간 내가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내가 당하는 폭력을 참는 것보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을 제거하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인간에게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내와의 삶을 통해 그것을 거의 날마다 확인하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아내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나를 통해 전광훈이나 손현보와 같은 이들이야말로 사람을 다루는 천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본능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런 그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망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그들은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두시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여하히 평화라는 불가능에 도전하는가에 올인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폭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망해야 한다는 말보다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내 말이 망하게 해달라는 말로 들리겠지만 내가 그런 생각까지 평화롭게 만들 수는 없다.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도 가능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바울 사도의 말이 생각난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치지 않는다. 그들이 망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자비를 보고 회개할 사람들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늘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난과 함께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으며 평화의 길을 간다. 매우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 비난도 나는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맞으면 맞을수록 평화에 대해 더 깊이 배우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내재되어 있는 내 안의 폭력을 발견하고 좌절하기보다는 평화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글로 적어보았다. 내 글이 곧 부채負債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