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다. 선교 지망생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어디든 갈 것이라는 마음의 다짐을 새긴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잘못 이해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엉뚱하게 알아듣는다. 그래서 땅 끝이라는 말을 타국으로 나가 선교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땅 끝이 정말 먼 타국을 의미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교란 가장 가까운 곳에서만 이루어진다. 한 예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선교에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 외국으로 선교사를 내보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선교비를 헌금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주일학교를 필두로 중고등부와 청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교에 실패하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현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에서 땅 끝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먼 타국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지구는 평평한 곳이었다. 당연히 땅 끝이 지구 끝이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된 오늘날의 땅 끝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선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증인이 되어 가장 가까운 사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예로 아미시 공동체를 든다. 아미시들은 선교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한다. 그들은 아미시의 삶을 자녀들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자녀들이 마을 안에 있는 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면 아이들에게 아미시 마을 밖으로 나가 일정 기간을 살게 한다. 아이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16세에 이른 아미시 청소년들은 '럼스프린가'라는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럼스프린가' 기간에 아미시 청소년들은 바깥세상으로 나가 속세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특혜(?)를 누린다. 그런 후에 일생을 아미시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결단을 스스로 내리게 된다. '럼스프린가' 를 마치고 공동체에 남기로 결정한 아미시 젊은이의 비율은 90%에 다다르며, 나머지 10% 정도만이 공동체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미시는 개인주의의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는 미국 한 복판에서도 소멸하지 않고 미국의 그리스도교와 달리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그 비결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그들의 삶이 그들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미시의 방식이 바로 위에 인용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삶의 본이며 그것이 바로 선교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오늘날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선교에 실패한 것이며 그 정확한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 “미션”에서 보듯이 총과 칼을 앞세우고 어떻게 평화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그와 같은 방식의 선교가 선교의 전부로 인식되고 있다. 선교가 식민지 정복과 함께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날도 여전히 힘과 영향력으로 이루어지는 선교를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 전파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확산일 따름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세계로”와 같은 모토다. 엄중한 탄핵의 시기에 부산에서 세계로교회의 손현보 목사가 주도하는 탄핵반대집회가 열렸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땅 끝”이 “세계로”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광훈은 그런 손현보 목사가 자신과 비교하면 “쨉도 안 된다.”는 말로 폄훼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제국주의의 전도사들이고 이들이 폭력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휘두른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미국은 오늘날의 제국이다. 이들이 스스로 제국주의의 선봉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로마인은 이 세상의 약탈자들이다. ...만일 적이 부유하면 그들은 강탈하고, 적이 가난하면 그들을 지배한다. 동방도 서방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약탈하고 살육하고 빼앗으면서 그것을 '제국'이라고 부르고, 폐허로 만들면서 '평화'라 부른다.” - 로마에 정복된 한 추장의 말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어 하고 있는 일을 보라. 예로 들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는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의 대명사로서 인류의 존엄을 파괴하고 있다. 미국이 위대해지는 것은 약탈하고 살육하고 빼앗음으로 가능하다. 그런 그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제국의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제국의 반대편에 서 있다. 제국은 폭력으로 평화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비폭력으로 평화를 이룬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비폭력으로 이루는 평화를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오래 전에 이미 제국주의의 하부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광훈이나 손현보와 같은 이들의 말투를 보라. 그들이 조장하는 폭력을 보라. 그들의 세력이 아무리 커져도 그들은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 그들을 복음주의 대형교회들이 암암리에 인정하는 것도 그들이 모두 제국주의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지적을 받고 있는 이찬수 목사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힘과 영향력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모든 시도는 제국주의의 하부구조가 된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나는 일로써 복음 전파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전파다. 그런 자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이다.(눈 있는 자는 볼지어다!)

선교란 증인 된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본 사람이 스스로 다가오게 만드는 것이다. 땅 끝이란 먼 타국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자녀들은 물론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감화시키고 그들을 매료시켜야 한다.

올해가 아미시가 속한 아나밥티스트들이 오백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 끝”과 “증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제국인 미국의 한 복판에서도 소멸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증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가장 가까이 있는 자녀들과 이웃인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고(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자. “땅 끝”이 “세계로”가 아님을 명심하면서!!!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