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수록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렵다. 인간은 많이 알면 알수록 힘을 가지게 되고 힘을 가진 인간은 교만해진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힘을 버리는 것이며 겸손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성은 매우 첨예한 판단의 대상이 된다. 인간이 이성에 몰두하면 카인과 같이 된다. 하지만 이성을 도외시하면 다른 피조물과 같아진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이 있기 때문이지만 이성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에게 이성은 다루기 힘든 보물이자 파멸로 이끄는 올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는 것은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이성은 그 한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인간에게도 절대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다른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만 스스로의 이성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처럼 군림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을 天子(천자)라고 했고, 로마의 황제는 자신을 神(신)이라고 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황제를 주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우리는 여기서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거부해야 할 절대성을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 매우 당연한 일이다.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다. 성서는 그 상태를 아주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한 바는 세상에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이 세상의 풍조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절대 권력을 추구하게 만드는 영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뿐만 아니라 힘센 자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지배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대인이 되어 사람들을 통치한다.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성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불순종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들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천한 이방인 노예가 되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성서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거기에 대항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단 한 번만으로 정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싸움이 된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에서 “우리”라는 단어야말로 핵심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 때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그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는 곳이 되었다.

교회가 조직이 되고, 교회가 대형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을 따르지 않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되고 말았다. 성직자들이 큰 자가 되고,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광훈과 손현보와 같은 목사들의 등장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의 집회가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교 자체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런 자들은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함으로써 하나님처럼 되고,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이성 자체가 마비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전광훈이나 손현보는 물론 그리스도교 자체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을 따르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엉뚱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욥을 언급하고 싶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보고 지금 욥이 말하고 있는 회개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묵상해보라. 욥이 말한 것이 잘못되었는가? 잘못되지 않았다. 그는 욥기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오직 하나다. 단 한 순간, 자기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말을 한 욥의 아내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에는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하도록 만드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영이 작용하고 있다. 그 영을 거부하던 욥 역시 극심한 심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 영을 따르게 되었고, 그것이 욥이 회개해야 했던 이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매사에 이성을 요구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그 이성을 내려놓아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이 일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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